민수기 12:1-3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시편 37:7-11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에게서 비방을 받았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구스 여인과의 결혼이 문제였지만, 논점은 곧 모세의 지도력으로 옮겨 갔습니다. 모세가 두 사람의 비방에 대해 반응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모세의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더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를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오테스’ 역시 사나운 들짐승이 잘 길들여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길들여진다는 말에는 오랜 인내와 훈련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의에 대해 눈감는 것이 아닙니다.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왜 온유해야 할까요?
원수를 갚는 것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롬 12:19). 모세가 본래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혈기로 인해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입니다(출 2:11-12). 그러나 모세는 더 이상 육을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통하며 어느새 하나님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비방은 모세를 향했지만, 그 비방을 듣고 행동하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결국, 미리암은 나병에 걸렸습니다(민 12:10). 모세는 화를 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리암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민 12:13).
예수님은 온유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십자가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길들여지는’ 것은 경건의(Godly) 훈련을 통해 가능합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닮아 가며 분노와 보복의 감정을 내려놓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 온유의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반응하며 온유의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십니다(마 5:5).
나는 온유한 사람입니까?
❶ 나는 분노를 잘 다스리는 사람입니까?
❷ 하나님이 듣고 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를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오테스’ 역시 사나운 들짐승이 잘 길들여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❶ 관련 설교 – 2007 성령의 열매, 온유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인 “온유”의 정의를 먼저 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유”라는 헬라어의 ‘프라우테스’라는 말은 따뜻함 혹은 ‘부드러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드러움이 유약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꺾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예를 든다면, 고대 중동지방에서 사나운 들짐승이 가축으로 자라 그 성질이 길들여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가 가진 가장 중요한 핵심의미는
‘잘 다스려졌다’는 뜻입니다.
❷ 관련 기사 – 광야의 시간을 거친 후 맺는 성령의 열매 ‘온유’, 이지현 기자 겸 논설위원, 국민일보
성경엔 병을 앓아 고열로 고생하는 사람의 열이 치료로 잡힐 때, 거센 돌풍이 부드러워졌을 때, 야생마가 길들여졌을 때 ‘온유해졌다’는 헬라어 ‘프라우스’를 사용했습니다. 힘 조절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참을 수 있는 힘, 조절할 줄 아는 힘, 다스려진 힘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힘이 잘 조절돼 인격 속에 구현되는 덕입니다.
[출처]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1947
길들여진다는 말에는 오랜 인내와 훈련의 과정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의에 대해 눈감는 것이 아닙니다.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❸ 관련 설교 – 2007 성령의 열매, 온유
그러나 온유함이 불의한 일들을 온전히 수수방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온유는 결코 우리들이 생각하는 온유의 모습하고는 차이가 있지요.
예수님은 때로 제자들을 무섭게 질책하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네 뒤로 물러서라” 하셨고, 성전을 정화하시면서는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분 냄을 가리켜서 “거룩한 분노”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을 누르고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길들여진다”라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한 순간에 온유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온유란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❹ 관련 설교 – 2022 ]말씀으로 돌아가자 4. 예수님처럼 온유하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성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것이 절실합니다.
누구나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이 때로 “방관”이라는 얼굴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희생과 온유한 사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교정하기 위한 엄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고민을 하고 살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화”를 내야하나 아니면 참아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화를 내는 것은 문제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위하여 화를 낼 수 있다면 아주 이상적인 성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한 사랑의 표현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살 수 있으며, 나 자신이 그러한 일로 인하여 견디기 힘들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비방은 모세를 향했지만, 그 비방을 듣고 행동하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결국, 미리암은 나병에 걸렸습니다(민 12:10). 모세는 화를 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리암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민 12:13).
❺ 관련 설교 – 2007 성령의 열매, 온유
모세가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결국 미리암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하거나 화나는 일이 생길 때,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단순히 맡기는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모세는 민수기 12장 13절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진정한 용서이지요, 진정한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축복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온유함의 열매를 맺는 이 용서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용서하고 싶은데, 내 감정이 처리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묻지요.
“예수님 도대체 얼마나 더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 .”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잘못할 수 있나요?
이 말은 끝없이 한 없이,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질 때까지를 뜻하는 말이지요.
문제는 순종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용서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축복하겠다는 마음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나는 본래 성품이 그렇지 못해요”라고 변명하는 분이 계시나요?
온유함은 내 성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내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온유의 열매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모세도 이전에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반응하며 온유의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십니다(마 5:5).
❻ 관련 기사 – 광야의 시간을 거친 후 맺는 성령의 열매 ‘온유’, 이지현 기자 겸 논설위원, 국민일보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부동산이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전심으로 따를 때,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주님의 나라가 바로 그 사람의 유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는 [무례한 기독교]에서 “온유는 그리스도인이 잃어버린 소중한 품 중 하나”라며 “남을 존중하고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들을 자신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하지 않아도 그의
온유함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1947
❼ 관련 설교 – 2020 Decision 4. 복된 삶을 살기로
‘땅을 차지하리라“
그 땅은 우리의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밟는 모든 것이 우리의 사역지가 되고,
우리를 환영하는 그런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믿기는 온유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굉장한 축복이요 은사입니다.
온유하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은 이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온유한 삶을 산다는 것이 참 멋진 일입니다. 흔히 말하는 ‘성공을 따라가면’ 불행하지만, ‘성공이 따라오면’ 신나고 복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흉내를 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흉내를 내는 것보다 힘들고 지겨운 인생이 있을까요?
게다가 흉내를 냈는데, 모방한 그 사람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다면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노력했던 삶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온유하게 살아갔던 복된 인물들이 흉내 내는 사람처럼 보상을 바라며 살았을까요?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가치를 알기에, 충분하게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이겠죠. 그리고 그런 삶을 산 사람에게 주어진 결과가 ‘복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참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어떻게 욕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까? 그런데 그런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땅을 아무리 많이 차지한다 해도 얼마나 차지할 수 있을까요? 자기 이름의 땅이 아니고는, 무서워서 한 발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에게 그 소유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차지한다고 해도, 그에게 진정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온유함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소유할 땅이 참 많습니다. 어디서나 환영받는 사람이 되니, 그가 밟는 모든 땅이 그의 소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의식이 바뀌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기 시작합니다.
어디에나 설 땅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온유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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