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양선은 선을 행하는 것(doing good), 즉 선함(goodness)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란 동일한 상황에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전제합니다. 또 ‘모든 이에게’란 선행의 구체적인 대상이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쉽게 낙심하며 선행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선을 끝까지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사람들처럼 행해야 합니다(갈 3:27).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로서 공손하고 예의 발라야 합니다. ‘공손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courteous’에는 왕궁을 뜻하는 ‘court’가 있습니다. 즉 왕궁에서처럼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신 주님 덕분에 신분과 정체성이 바뀐 우리는 새로운 직무와 직능을 행하게 됩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성품과 태도를 배우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시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5). 우리에게도 동일한 성품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선함은 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시 100:5).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요 10:11). 대상이나 환경을 보면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뿐 아니라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처음 창조하셨던 선한 모습 그대로 세상과 사람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 역시 창조의 동역자로서 선을 행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에 동참합니다. 나와 너, 곧 우리가 창조 세계에 부여하신 가치와 특권을 인정하며 지키는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삶에 양선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❶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닮아 가고 있습니까?
❷ 하나님이 세상을 가꾸시는 일에 동역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선을 끝까지 행할 수 있습니다.
❶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내 앞에 있는 상대방 때문에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앞에 내가 서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예의 바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삶에서 ‘예의 없음’은 때로 성령님을 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적절한 예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지난 해 교인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며 요르단 광야를 지날 때였습니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쉴 때였는데, 막 다른 한국 팀이 들어왔습니다. 한 분이 저를 보더니 “김병삼 목사님을 닮았다!”고 합니다. 한 교인이 ‘김병삼 목사님 맞습니다!’라고 했더니,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지순례 팀 중에 한 사람이 저하고 사진을 찍자는 겁니다. 그래서 찍었죠.
그랬더니 또 한사람이 저와 사진을 찍자고 하더군요.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니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저하고 사진을 찍자고 하니 사진 찍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을 믿지 않거나 동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동행하고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왕이신 주님 덕분에 신분과 정체성이 바뀐 우리는 새로운 직무와 직능을 행하게 됩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성품과 태도를 배우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시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빌 2:5). 우리에게도 동일한 성품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❷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주님의 종]에서 저자 윌리암 보더스는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걸하러 나선 한 흑인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 남부의 한 저택 벨을 누르자 뒷문 쪽으로 와보라는 말이 들렸고 그는 먹을 것을 얻으려 뒷문으로 간다. 그러자 저택의 주인 남자가 뒷문에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나를 따라 말해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굶주린 남자가 따라 했다. “하늘의 계신 그대의 아버지. . .”
“틀렸어요.” 집주인이 말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그러자 그 흑인은 완강했다. “하늘에 계신 그대의 아버지. . .”
지친 나머지 집주인이 물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라는데도 계속해서 ‘그대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요?”
그 남자가 대답했다. “만일 내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먹으라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➌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도덕적 수준의 의무입니다. 그것은 의무와 동시에 책임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으로 인해 나의 신분으로 인해 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흔히 ‘공인’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장관쯤 되는 사람들의 자녀에
대해 관심이 참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냥 ‘잘못했네’라고 넘어가 수 있는 일이,
이들 앞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군대 안간 남자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군대 안간 아들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사 표현을 SNS에 맘 놓고 하지만, 정몽준 씨 아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한 번 잘못 썼다가 아버지가 대선 후보에서 탈락하기도 했죠.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억울한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예의를 더 갖추고 살아야 하는 삶의 특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과 기준이 다르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양선’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도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 힘들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차별이라고 항변해 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한 잣대로 판단을 받을 뿐입니다.
이것은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죠.
아버지가 유명인이기 때문에 억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는 자로서 마땅히 더 신중하고 사려 깊고 예의가 있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신앙적인 언어로 이렇게 정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거운 굴레로 느껴질 때 “율법 아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한 특권으로 느껴질 때 “은혜 아래 있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지켜야 하는 품위와 예의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에 동참합니다. 나와 너, 곧 우리가 창조 세계에 부여하신 가치와 특권을 인정하며 지키는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삶에 양선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❹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무례함”의 특징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불평이라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탈 때, 제가 특별히 착하거나 겸손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지금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과 ‘누군가의 사랑을 입었다’는 생각이 저를 예의바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비즈니스석을 타려면 오랫동안 마일리지를 모아서 꼭 필요한 때에 사용해 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입니까?
사랑이 왜 무례하지 않을까요? 과분한 사랑을 받은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무례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에서 비즈니스석과 일등석으로 좌석이 업그레이드 된 것보다 더 놀라운 공짜 선물을 받지 않았나요?
죄인의 삶에서 하나님 자녀의 삶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 말입니다.
지옥행 티켓을 쥐고 살다가 어느 날 천국행 티켓으로 바뀐 놀라운 일말입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으로 살다가 어느 날 소망과 기쁨, 기대로 바뀐 인생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무례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정말 무례한 사람들인가요?
자신의 돈으로 당연히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친절하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나 당연히 누리고 있는 권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무례한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받는 서비스와 섬김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구분이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특권을 감사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교만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➎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필립 얀시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교회가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이나 정치적으로 깨끗한 곳이라기보다는
다른 죄인들을 환영하는 죄인들의 모임으로 인식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흔히 교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싸움”과 “무례함”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마디로 “권리포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
하나님의 형체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양편에 강도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웃으며 조롱합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세상은 우리들에게 힘을 가지고 있으면 마땅히 그 힘을 쓰는 것이 옳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신 이유는 ‘권리’를 쓰는 것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➏ 관련 설교 – 양선 :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맺어지는 열매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받을 마땅한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있을 때, 여유가 있을 때, 마음이 내킬 때, 선을 행하지만 성령의 사람은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합니다. 소위 말하면 ‘오버’하는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예의를 갖추거나 친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지나치게 오버하는 선한 행동을 먼저 보여야 합니다. “누가 오버할 것인가?” 누군가가 예측을 벗어난 친절을 행할 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늘 “surprise"한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의 역동성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지루하지 않습니다.
늘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죠.
제가 늘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정말 기분 좋게 서비스를 받을 때도 있고, 불쾌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쾌해도 종업원들에게 팁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이 서빙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가진 것과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요?
마땅한 권리가 아닌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이죠.
화를 내거나 무례하기보다는, 사랑이 먼저이기에 예의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누려야하는 권리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혼낼 때, 당연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하기 시작할 때, 성령의 열매인 ‘양선’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누군가가 바라보며 우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군요!” 라고 말입니다.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