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이란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께 온전히 양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의 일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상대방의 헌신과 죽음을 강요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기 죽음을 잊은 자는 여전히 ‘나’중심의 삶을 삽니다.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의미 있다고 착각하며 노력과 헌신으로 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주변의 관계들이 깨어집니다.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님께 온전히 양도했습니까?
자녀, 결혼, 물질, 상처 등과 관련된 영역을 두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제한 구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99개를 내려놓아도 마지막 1개를 내려놓지 못하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마 19:21). 얼마나 ‘많이 믿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쳐 복종했습니다(고전 9:27).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빌 4:11). 끊임없이 내려놓고 위임하며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믿음을 쌓아 간 것입니다. 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빌 4:13). 헬라어 학자 케네스 웨스트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내게 힘을 불어넣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맞이한다.” 내게 끊임없이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생명과 지혜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와 사역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음을 늘 되새기며 살아갑니까?
❶ 나의 사역과 관계에는 어떤 열매들이 맺혔습니까?
❷ 내가 만든 ‘제한 구역’들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이란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께 온전히 양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죽음을 잊은 자는 여전히 ‘나’중심의 삶을 삽니다.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주변의 관계들이 깨어집니다.
❶ 관련설교 – 2008 믿음을 새롭게 (1)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깨어진 관계를 훈장처럼 생각하지 않았나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핍박을 받고 관계가 깨어질 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대한의 헌신을 드렸던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많은 상처를 주고, 또는 받고 있을까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욱 좋은 관계들을 만들어가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핑계를 대며 깨어진 관계들을 정당화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우리들 주변에서 교회와 가정을 위해 최대의 헌신을 함에도 불구하고, 만족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상처를 받거나 주고 있는 경우들이 허다하지 않나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사실은 내가 하고 있는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당화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힐 때가
있다는 사실이지요.
제가 묵상하며 생각하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나의 상처를 아픈 마음 그대로 안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헌신한다고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상처받은 나, 만족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헌신하며 사역하는
여러분들이 이런 상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헌신하면 할수록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면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주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제한 구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믿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증거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수없이 기도하고 설교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며, 아니 그렇게 살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내 모습 속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이지 않고 나의 육신의 정욕에 의해 움직이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런 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이용규 선교사의 책에 나오는 구절을 하나 더 살펴볼까요?
대부분 아직 미혼인 사람은 기도할 때 “주여! 모든 것을 주 뜻대로 이루어주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결혼만은 내 뜻대로 하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헌신을 다짐하는 기도를 할 때 “주여, 이 몸을 주님께 바칩니다!” 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그래도 이거, 이거, 이거는 안돼요.’ 하는 게 있다. ‘하나님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바란다. 설교를 들을 때도 자신이 허용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움츠러든다.
“하나님, 여긴 제 영역이에요. 안 도와주셔도 됩니다. 방해만 하지 마세요.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요.”
“하나님, 이건 하나님과 타협이 안돼요. 나는 내 길을 가렵니다.”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내려놓지 않고 움켜쥐는 것이 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자녀의 대학진학 문제가 특히 그렇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업하는 방식에 그런 요소가 많다. 혹시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하실까봐 “이것만은 안 되는데…”하면서 막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 부분에 대해 하나님이 이 책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다루시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수없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우리의 뜻대로 하고, 우리의 판단에 의지 할 때가 참 많이 있지요. 신앙의 성숙함이란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할 때가 많은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아니 제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도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꿈을 누리지 못하는 때가 많이 있지요.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쳐 복종했습니다(고전 9:27).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빌 4:11). 끊임없이 내려놓고 위임하며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믿음을 쌓아 간 것입니다.
❸ 관련설교 – 2008 믿음을 새롭게 (1)
우리들의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감사와 만족이 없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부족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산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고, 열심히 헌신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4장 11절을 보세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는 "배웠다"라고 생각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어는 순간에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믿음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고백하고 깨닫게 되었던 것 역시, 바쁜 목회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종되고 일에 중독되면서 만족을 잃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알렉산더 신드롬"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데, 그가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위대한 영토를 확장하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안해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저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구절, 마도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인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을 보세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케네스 웨스트라는 헬라어 학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내게 힘을 불어넣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맞이한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게 끊임없이 그 분이 힘을 불어 넣으시고, 내가 끊임없이 그 분과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한, 나의 삶에서 만족과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 틈에서도, 어떤 인생의 계획 가운데서도 그 분이 나에게 끊임없이 힘을 불어 넣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믿음의 시작입니다.
❹ 관련예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J.D.그리어, 두란노, 18.06.20)
나처럼 믿음을 추구하는 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두려워하는) 단계를 건너뛰려는 사람이 많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의 출발점이다. 그 두려움은 그분을 향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며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예배와 믿음, 열정, 순종은
오직 깊은 경외감의 토양 위에서 싹이 나고 꽃을 피운다. 경외함 없이는 믿음도 없다.
하나님이 측량할 수 없이 크고 지혜롭고 선한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분을 축소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그분과
동격이라고 착각한다. 그분의 지혜가 우리보다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분의 길이 우리보다
얼마나 높은지, 그분의 생각이 우리보다 얼마나 순전한지 생각해 보지 않은 탓에 몇 가지 답만
더 알면, 조금만 더 설명을 들으면 눈앞이 환해질 거라고 착각한다.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너무도 위대해서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분, 너무 선해서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는 분. 그 하나님을 봐야 한다.
당신은 둘 중 무엇을 원하는가? 내 사고 안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신? 아니면 감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라 두려움이 느껴지는 하나님? 우리가 예측하고 지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신에 대해서는 사랑하거나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그런 신은 우리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영광과 비극을 설명해 줄 만큼 지혜롭거나 영광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믿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 머리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작게 축소시킨 신은 우리가 예배할 만큼 크지 못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측량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만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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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한 구역을 없애는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육신을 방어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 삶을 살아가는 행함이 인간입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께 온전히 양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내 마음에 생각하는 것들에 의하여 나의 자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생각들의 자아를 버리고 양보해 주님 마음의 생각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내 죄의 자아는 죽이고 예수님의 진리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죽음을 잊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갑니다.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의미 있다고 착각하며 노력과 헌신으로 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님께 온전히 양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제한 구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삶에 자기의 생각과 마음으로 자기 영의 제안 구역을 만들어 놓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말로는 잘 하면서 실제의 행함은 엉뚱한 자기중심의 일을 합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 하면 자기 생각으로 꽉 차여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각을 쳐 복종했습니다.(고전9:27)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빌4:11) 끊임없이 내려놓고 위임하며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믿음을 쌓아 간 것입니다. 또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빌:4:13)
나는 끊임없이 내게 힘을 불어넣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맞이합니다.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그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생명과 지혜를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관계와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2:20) 말씀과 같이 나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아 내 마음의 제안구역을 없애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복종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내 마음의 제안구역을 없애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감사
오랫동안 품었던 봉사의 자리였기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제한구역 안으로 들여놓았고 그 즈음에 받은 헌신의 자리에 대한 제안은 또 기도도없이 거절함으로 제한구역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
오늘의 말씀은 제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같이 느껴집니다.
제게 연속적으로 이 불편함과 거룩한 부담감을 주신다면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나는 죽은 사람들>
어제는 재량휴업일이라 집에서 쉬었습니다
퇴근길에 한편씩 봤었던 미스터션샤인을 봤습니다
9화를 보았습니다
지게꾼인 척하던 의병 한 명이 잡혔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이름을 말하라는 추궁을 받습니다
의병은 자신을 죽이라고 하며 칼에 목을 갖다댑니다
저 같으면 한번만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것 같은데요
의병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저 의병에게는
목숨을 버릴 만큼의 큰 값어치가 있었구나...
저렇게 이름 없이 죽어간 조상들이 있어서
오늘날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생각했습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묵상집에서는 ‘그리스도인=나는 죽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이란 나의 의지와 권리를 주께 온전히 양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저를 돌아봤을 때?그리스도인이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죽기는커녕 자아가 쌩쌩하게 살아 있습니다
죽지 못하고 자아가 살아 있는 이유는?
값어치를 어디에 두느냐..같습니다
의병은 자기 목숨보다 조선을 더 값어치 있게 보았습니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자신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더 크고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도 갈길이 너무나도 멉니다
제가 값어치를 두는 건 사사로운 목숨, 이 세상의 삶이라서요
하나님이 더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야만..!
바울처럼 예수님이 더 크게 보일 것 같습니다
성령님! 뭐가 더 중요한지, 무엇을 더 크게 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관을 갖게 해주세요
그래서 제 안에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시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