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진정한 믿음은 ‘영생’을 얻기 위한 믿음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믿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가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과 성경 공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바리새인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영생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지적으로 거부(refuse)하기까지 했습니다(요 5:40, NIV).
‘영생’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닙니다. 영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일 5:11). 하용조 목사는 영생을 가리켜 ‘단순한 영원불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삶에 동참하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요 5:24).
영생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육신의 유한함과 문제들에 절망하지 않고, 영원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려놓음은 하나님께 우리 삶을 전적으로 양도(yield)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시도록(let go) 위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최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❶ 내 소망과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믿음은 아닙니까?
❷ 영생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갑니까?
바리새인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영생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지적으로 거부(refuse)하기까지 했습니다(요 5:40, NIV).
❶ 관련 설교 – 2021 믿음으로 함께 6. 내적인 증거를 보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시는 장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살아도, 내적인 믿음의 확신과 증거를 보이지 않는 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은 잘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성경은 연구하는데,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분이 예수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책이 무엇입니까? 겉모양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성경적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5장 40절을 보겠습니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을 NIV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0절
40. yet you refuse to come to me to have life.
저에게 이 ‘refuse’라는 말이 ‘의지적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자신들이 믿는 것에 확신이 강했으면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믿기를 거부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아주 유명한 사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러니,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지키며 살아가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죠.
오스왈드 챔버스는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려놓음은 하나님께 우리 삶을 전적으로 양도(yield)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시도록(let go) 위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최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❷ 관련 설교 – 주님은 나의 최고봉 103. 영생을 나눔
오스왈드 챔버스는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역시, 챔버스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주장하는 ‘순종’과 연관이 있습니다. 순종은 ‘전적인 위임’ 즉,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양도’(Yield)하는 것임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것, 이보다 ‘순종’을 잘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묵상 글에서는 챔버스가 ‘let go’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분이 하시도록’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그 분이 행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챔버스는 “We have to keep letting go”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일하시도록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양도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천천히 충만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를 양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 붙잡고 있던 것을 놓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집착일 수 있고, 때로는 우리가 즐기던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태완 목사님의 책 [기쁨의 샘]에 소개된 예화입니다.
팻 로버슨 목사는 예일대 법학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주 상원 의원이며 은행통화위원장이었습니다. 팻 로버슨 목사는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날 퇴근시간에 한 잔 하러 가자는 친구의 요청을 뿌리치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여보, 나 구원 받았소” 하고 외쳤습니다.
“당신 미쳤군요” 하는 아내의 소리에, “난 미치지 않았고. 난 구원을 받았단 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취침 시간쯤에 아무 말도 없이 찬장 문을 열고 거기 있던 위스키 병을 내려놓고 하나씩 마개를 열고 하수도에 쏟아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콸…콸…콸
“당신 왜 이래요? 얼마나 비싼 것들인데!” 하면서 아내가 달려와 마지막 술병을 움켜쥐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빼앗아 다 쏟아버렸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버리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종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서 그 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우리의 능력을 주장하는 순간 주님의 생명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❸ 관련 예화 – 앤드류 머레이, 『완전한 순종』
우리가 특별한 존재로 있는 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완전히 작용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즉, 자아에 대한 전적인 절망, 곧 사람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끝내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을 찾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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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삶에 동참하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영생을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 배웠던 때가 있었기에 믿음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 이 땅의 삶에서 천국을 누린다는 것 그리고 영생의 삶 안에서 오늘도 산다는 게 사실 딴 나라 얘기처럼 여기며 수박 겉핥기 신앙생활을 했드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요 5:24).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말씀 따로 삶 따로였던 지난 날이 안타깝습니다.
영생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주님으로 인해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육신의 유한함과 문제들에 절망하지 않고, 영원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인생이길 원합니다.
1.믿음은 어디에서 올까?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서 옵니다.
오직 무엇에만 의존 했는가?
하나님 말씀에만 의존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일을 하도록 기대하는 것이며 그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다만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분명하고 자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본능의 믿음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든 인간들은 우주의 질서와 법칙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교육과 경험 또는 과학으로 입증된 사실에 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믿는 이성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믿음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세계를 초월한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고 말씀하십니다.
3.믿는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3) 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영생을 얻기 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인하는 것이니라.”(요5:39) 영생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일5:11) 영생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양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최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능력과 생명을 누리며 영생을 얻은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