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5월 19일 우리 아버지
이전으로
2023년 05월 19일 금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3년 05월 19일 금요일
다음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

5월 19일 우리 아버지

통독표
video poster
마태복음 6:9
펼치기/접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중시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나를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먼저 향하게 만듭니다.

주기도문은 ‘연합’을 지향합니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우리’아버지라 부르는 공동체 영성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국가와 인종과 문화와 세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성별과 세대 간의 갈등이 충만한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엡 4:1-6).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뿐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기도가 누군가에게 피해나 아픔을 주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친밀함과 거룩한 초월성을 함께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랑과 친밀함으로 다가가되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경외와 두려움으로 서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합니다(마 6:9).

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온전히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삶에 대한 결단이기도 합니다. 나와 신앙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 가운데서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나의 기도는 주기도문의 정신에 부합합니까?

❶ ‘나’만 위해 기도합니까? 아니면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까?

❷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까?


묵상 도움글
펼치기/접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중시합니다. 주기도문은 나를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먼저 향하게 만듭니다.  

❶ 관련설교 – 2022 변화산, 4.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기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인격성 그리고 관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마을에 홍수가 몰아쳐서 목사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할 때, 교회 신도가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빨리 높은 곳으로 피하시지요.”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구해주실 것이오.” 

잠시 후 경찰관이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빨리 이 보트로 대피하시오.” 

“주님이 기도에 응답하실 겁니다.” 

그 순간, 목사는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 

하나님 앞에 선 그는 원망을 담아서 말했다. “주님, 어찌 제 기도를 외면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목사를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네 기도를 듣고 교인, 경찰, 보트까지 보냈거늘 너는 어찌 모두 거부하고 이곳에 왔단 말이냐?” 

 

하나님은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것을 우리가  

명확하게 아느냐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자기중심적인 틀 안에서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자기중심적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께 향하도록 했다는 것이며, 이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우리’아버지라 부르는 공동체 영성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엡 4:1-6).  

관련설교 – 2022 변화산, 4.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우리는 서로 연합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어디에도 ‘나’ 혹은 ‘나의’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점입니다.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전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이 사회에서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공동체의 영성  

말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홀로 선 둘’의 만남이야말로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홀로 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단순히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억압하거나 지배하는 것도 아닌 ‘우리’라는 개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모여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 위기 중에 하나는  

‘교회의 공공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므로 인해 이 사회와 이웃들에게  

어떤 공공의 유익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느냐는 것이죠.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함께 축복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온전히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삶에 대한 결단이기도 합니다. 나와 신앙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 가운데서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관련설교 – 2022 변화산, 4.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기 

친근한 우리 아버지를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엄격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친근한 아버지 앞에 갈 때, 우리는 그 아버지 앞에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그분 앞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 크리스천 공동체가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금까지 우리 신앙의 문제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나’를 높이기 위해 애써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을 이용해 사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짓된 삶과 사역을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신앙 중 가장 위대한 것은 그가, 항상 기뻐하며, 항상 기도하며, 항상 감사하는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도 그 분이 함께 함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어지는 순간, 그 분이 자신 속에서 살아 계심을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일컬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사실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하나님 아버지만 드러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교회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목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지 않겠습니까? 

거룩의 의미가 나로 인해 하나님이 욕을 먹지 않는 것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매일 묵상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관련예화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재훈, 두란노, 18.12.12)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면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가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과 결정대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말씀을 읽지 않을까요? 말씀을 읽는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왜 바쁘게 살아갈까요? 조용하고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면 하나님이 생생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는 본성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했을 때부터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본성상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밖에서 태어난 인생이 되었습니다.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그들에게는 돌이켜 회개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온 인류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하지 않으면 이는 심판으로 끝나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이는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를 천 년 같고 천 년을 하루같이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며 인내하고 계시지만, 역사의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무감각하게 따라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역사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한 영혼이라도 더 들어오기를 기도하며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관련예화 (“교회, 외로움을 돌보다” 국민일보 기사 발췌 2023.02.01.) 

‘나’를 넘어 ‘우리’를 향해 나가는 진정한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 사역모델 제시 

 

“백날 창문 하나 없는 방에 혼자 처박혀 있으면 뭐합니까. 그래도 여기(쉼터) 오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고,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말동무도 하나 만들고 그러는 거지요.”(유정민·가명·57) 

 

지난달 21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서 만난 유정민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참 소중한’이란 이름의 쉼터를 찾는다. 2021년 말 기준으로 4가구 가운데 3가구꼴(75.4%)로 ‘1인 가구’인 동네 주민들을 위해 친구들교회(배홍일 목사)와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이영우 신부)가 힘을 모아 3년 전 만든 공간이다. ‘마음을 위로하고 공동체를 만들어주자.’ 조사전문기관인 피앰아이가 31일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외로움 척도 지수와 종교 상관관계’ 조사에서 결과를 분석·도출한 외로움 극복을 위한 종교의 역할이다. 

 

사회학·종교사회학 전문가들은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전한다는 기독교 본질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심리적 위로와 커뮤니티 형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입을 모았다. 외로움 돌봄 시대를 맞은 2023년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정재영 실천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소그룹 활동과 친목 교제가 일상화돼 있는 교회 공동체는 지역사회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정보가 모이기에 좋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장점으로 활용한다면 정서적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수원 세 모녀 사건’처럼 정부나 공공기관이 발굴하기 어려운 취약 계층에게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효민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도시화·근대화를 겪으면서 주거 문화의 변화가 공동체의 와해로 이어졌고 공동체성 결여가 외로움 문제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건 정부 회사 학교가 해줄 수 없는, 종교에 특화된 영역”이라며 “종교계가 신자 그룹 안에서만 묶으려고 하기보다는 외부의 사람들까지 함께 묶는 역할을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출처: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84981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Download
PDF 다운로드
묵상 일기
0 / 5,000
묵상 나눔
박관석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성경의 사대복음서 중에 마태복음(6:9~13)과 누가복음(11:2~4)에만 기록된 주기도문은 예배 전후 매번 암송하기에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생활에서도 그럴까요?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쳐줄 상시 유대 사회에는 수많은 정석화된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카다쉬’라는 짧은 기도부터 ‘18번 축복기도(세모네 에스레)’라는 다소 긴 형태의 기도가 공식적인 기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런 기도문이 있었음에도 ‘왜 주님께선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먼저 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면 “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기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이 기도 방법을 몰라서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를 알려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조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부흥 운동인 셈인데, 당시 ‘바리새인들의 운동’과 ‘에세네파 운동’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흥 운동의 중심에는 세례 요한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고 이것을 공유하며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맥락으로 예수님의 제자도 기도문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놀랍습니다. 짜임새 있는 마태복음에서 특별히 보석과도 같은 ‘산상수훈’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본문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마태는 그만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큰 강조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본격적인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기도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입니다. 5절 말씀을 통해 외식하는 자와 같은 기도, 즉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가르침에는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에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입니다. 7절 중언부언하는 기도 즉 의미 없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갈멜산, 엘리야와 대결한 바알 선지자들처럼 우상에게 하는 기도가 대표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8절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아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알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후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9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참 귀한 의미가 담겨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렇게 기도하라 는 말씀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의 힘은 얼마나 강한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알고 계실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응답에 대한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5;24 믿는 자의 특권은 과거 죄로 인한 심판에서 벗어나 새 생명이 주어지고, 현재 영생이 주어지면 결국 미래에는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5:7에서는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원하고 구하는 대로 얻어질 것이라고, 마태복음 7:11에서는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며 기도에 대해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린 오늘 우리가 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를 주기도문을 바탕으로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 입맛대로 하는,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기도는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이 믿고 행동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을 제각각 요약해 주는 세 가지 훌륭한 기독교 신조다. 특히 주기도문은 놀라울 정도로 함축적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은 복음의 요약이며 신학의 몸통이다. 간구의 원칙이자 살아가는 모든 일의 열쇠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주 기도문보다 더욱 명확히 알려주는 것은 없다.”

주기도문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삶에 주님의 은혜와 역사와 사랑이 가득 채워지며 또한 흘러넘쳐 복음으로 이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23.05.21
최주창
우리 아버지

1. 하나님을 왜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가?
육적인 아버지는 보이는 아버지라 인정이 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므로 영적인 아버지는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믿는 사람도 왜 아버지라 말하지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지 성경을 한 번도 통독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니까 아버지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고 확실한 증거를 알고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나의 상처와 아픔을 강렬하게 하나님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고하여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매달려 갈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사랑함으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죽은 삶을 살리는 삶으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애타게 말씀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친밀한 애정으로 살려 낼 것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영적 증거
우리의 육적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있듯이 영혼도 아버지 어머니가 계십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씀은 씨가 되어 말씀을 받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성도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영적으로 형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중요시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공동체 영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보편적 가치로 국가와 인종과 문화와 세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가족으로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이 되어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라는 호칭은 친밀함과 거룩한 초월성을 함께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랑과 친밀함으로 다가가되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경외와 두려움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므로 영광되어 거룩한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5.20
김은실
DTS에 학생으로 참여중입니다.
5월 과제 중 독서가 있는데 필독도서는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입니다.
로렌 커닝햄이라는 신앙인이 문제나 거룩한 하나님의 사업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삶의 모양을 담아낸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50년 신앙의 기도생활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책을 거의 다 읽다가 저녁시간에 사우나에 갔습니다.
결정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어느 곳이 내가 서기를 원하시는 곳인지 시기까지 꼭 응답 받고 싶어 기도 중이라 책에서 본대로 사우나에서 땀흘리며 따라해봤습니다.
먼저 사탄의 방해를 물리치는 기도를 하고 내 생각이나 경험 등 다 버리고 온전히 내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는 과정입니다.
늘 기도를 대충 하고 얼추 그러시겠지 단정짓고 살아왔는데 이젠 이 책에서처럼 우리 아버지의 음성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제대로 알아 나가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신앙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를 향하던 시선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먼저 향하도록 늘 경계하겠습니다.
2023.05.19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