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에베소서 4:32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 ‘용서’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가 오늘날 나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용서는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비를 가리고 일의 선후를 따지셨다면 하나님의 뜻, 곧 구원의 역사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서에는 기적과 기쁨이 담겼습니다.
예수님은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7:37-50). 여인의 삶에 평안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을 받고 그 기쁨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딤전 1:13-16; 롬 11:13).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죄 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놀라운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요 5:24).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통곡하며 돌이켰지만,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완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죄인의 문제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주홍같이 붉은 죄를 자백하고 주께 돌이키면 용서와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과 용서를 원합니다.
필립 얀시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에서 한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을 찾기로 결심하고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파코야,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아빠는 너를 다 용서했다. 나를 용서해 다오. 아빠가.” 그날 호텔에는 무려 800명의 ‘파코’가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과 비은혜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❶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진정한 회개로 나아갑니까?
❷ 서로를 비난하는 악순환을 끊고, 용서의 자리로 먼저 나아갑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끝까지 ‘용서’하셨습니다.
❶ 관련 설교 – 2011 십자가 위에서
“용서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용서를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하는 것이다”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용서는 무의미하며,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상대방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인 “선포”를 하고 계십니다.
가만히 성경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일방적인 선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어떤 상담하던 신자에게 원로 목회자가 대답한 멋진 말이 있습니다.
용서란?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항복이란? 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승리란? 마지막 목표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표를 향해 반대편과 싸워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뢰란? 남들 따라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둔 골짜기라도 신뢰의 대상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남들이 줄 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이 주지 않을 때 주는 것입니다.
❷ 관련 예화 – 서로 용서합시다, 이동원 목사, 『목회와 신학』, 1998년 12월호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라, 서로 불쌍히 여기라, 서로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용서의 필요는 일방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입니다. 인간됨은 실수의 가능성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아직 우리의 성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면 실수는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곧 생존의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기독교가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용서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불과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자기에게 진자를 용서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 해를 보내면서 용서해야 할 이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과 용서를 원합니다.
❷ 관련 예화 – 용서의 주간, 『김장환 큐티 365』, 나침반출판사(2013. 산상수훈 11. 중)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게는 용서의 주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이 부족 외에는 어떤 곳에도 이런 풍습이 없다고 합니다. 이 용서 주간은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날씨가 좋은 날을 잡아서 그 부족의 모든 사람이 지금까지의 잘못들이 오해든 사실이든 상관없이 모두 용서해주는 주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죄를 용서받고서도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잘못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빚 탕감의 비유를 들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이런 일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주위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아무런 단서를 달지 마십시오. 용서에는 특별한 날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날씨가 좋아서 용서의 주간을 정하고 용서의 주간이기 때문에 모든 잘못을 용서 해주는 어느 아프리카 부족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두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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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 하셨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이 말씀에 마음에 와 닿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행동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화해 과정으로 용서에 있어서 사랑의 결과입니다. 용서는 사랑으로 의로움을 나타내므로 합하여 선을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향유 옥함을 깨뜨린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평안히 가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랑의 마음을 주고받는 평화의 마음을 주는 기쁜 마음입니다.
용서는 어두움이 주 안에서 빛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사랑의 빛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나는 실제의 삶속에서 남과 어떤 사건에 다툼이 있을 때 용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에
자신의 잘 못은 자신이 알기 때문에 먼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하면 상대방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되어 평화로 끝이 납니다.
악수를 나누면 어두움이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용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사랑으로 대하면 개별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존엄이 되어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그럼으로 인생은 용서하고 사랑으로 살아가면 극치의 아름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상대방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인 “선포”를 하고 계십니다.
반면 나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용서는 무의미하며,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잘 모르는 관계거나 두 번 안 볼 사람에 대한 용서는 차라리 쉽습니다.
내가 지금 가장 힘든 것은~~
매일 봐야 하거나 용서를 한들 깨닫지도 못할 수준의 사람이거나 용서받은 후에 어떻게 반응할 지가 뻔할 과거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용서는 반쪽짜리에 불과함을 말씀하십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사건에 대해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전혀 힘들지도 않지만 용서의 기쁨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하셔야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는 용서는 반쪽짜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성령님!
저를 통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