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나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흔히 하기 쉬운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최선인가가 중요합니다. 믿음과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간격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그저 교회를 오래 다닌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최선이 하나님께도 동일한 의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이 종교적 행위는 아닙니까?
내 방식의 사랑과 호의가 상대방을 늘 기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일방적인 종교 행위에 불과합니다. 종교적 행위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며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나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결과들을 애써 외면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스카이 제서니는 “신앙은 ‘도덕적 공식’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살면 잘될 것이라….” 선을 행하며 도덕적으로 살았더니 성공했다는 신앙 간증들을 간혹 듣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고난과 고통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 가운데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적이며 신묘막측하여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말합니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힘써 알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마음과 뜻과 관심을 헤아리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적인 결속과 결합, 즉 온전한 연합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 나와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❶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은 어느 정도입니까?
❷ 하나님과 그분의 마음과 뜻과 관심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뜻하신 최선인가가 중요합니다. 믿음과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종교인가, 관계인가_관계를 Change하라
NFL 와이드 리시버 스티비 존슨은 엔드 존에서 날아온 패스를 받아 내지 못한 뒤에 다음 트윗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이 공을 잡도록 도와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분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셨다고 판단되자 그는 SNS를 통해 그분께 한바탕 퍼부어 댔다.
“나는 매일 하루 종일 당신을 찬양했어요!!! 그런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요!!
이 일에서 교훈을 얻으라고요?? 어떻게?? 교훈은 무슨! 이번 일을 절대 잊지 않겠어요.
절대!!!”
스티비 존슨의 트윗은 종교의 첫 번째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응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는데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소위 ‘확증 편향’ 때문이다. 종교들은 기도나 의식, 도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건은 요란하게 선전하고 하나님의 침묵이나 비협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무신론 철학자 디아고라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사람들이 디아고라스에게 신의 존재를 설득시키기 위해 기도했다가 난파선에 구조된 선원들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는 시큰둥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기도했지만 끝내 익사한 선원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죠?”
죽은 사람은 기대를 저버린 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 법이다.
내 방식의 사랑과 호의가 상대방을 늘 기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❷ 관련 자료 – 호랑이와 암소의 사랑에서 배우는 지혜 [오마이뉴스 교육 2008.10.27.]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1433
호랑이는 암소를 위해 열심히 사냥을 했다. 암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했다. 토끼도 사냥하고 노루도 사냥하고 때로는 멧돼지를 사냥하여 사랑하는 암소에게 물어다 주었다. 호랑이의 마음에 감탄한 암소는 열심히 생고기를 먹었다. 솔직히 맛이 있어서 먹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워 열심히 먹었다.
호랑이에게 보답하기 위해 암소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암소는 호랑이를 위해 제일 맛있는 풀들을 뜯어다가 호랑이에게 주었다. 소가 제일 좋아하는 자귀나무 꽃과 잎사귀도 따다가 주고, 신선한 콩잎도 따서 주고, 연한 보리 잎도 따서 꺾어다 사랑하는 호랑이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호랑이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것은 노루고기나 토끼고기인데 암소는 매일 풀만 뜯어다 주었다. 호랑이는 사랑하는 암소가 뜯어다주는 풀을 열심히 먹었지만 힘도 빠지고 점점 말라 이제 사냥이 어렵게 되었다. 암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생고기를 먹었지만 살이 빠지고 근육이 약해져 쟁기질도 할 수 없었고 수레를 끌 수도 없었다. 서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역설처럼 서로를 위해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❸ 관련 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종교인가, 관계인가_관계를 Change하라
2018년 NFL 우승 필라델피아 이글스 영상.
기적을 일구어 낸 팀,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제압하고 우승을 했습니다. 그 날의 MVP는 닉 폴스가 차지했는데, 3개의 터치타운 패스에 337야드 전진을 이끌어 내며 기적과 같은 우승을 견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승보다 더 감동스런 스토리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규시즌에 단 3게임 밖에 출전하지 못했던 그가, 은퇴를 고려해야 할 시기에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시작한 그가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그 혼자의 일이 아니라, 팀 전체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기도했고, 성경공부를 하고 월요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시즌 중 3명의 선수가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미식축구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식축구를 ‘platform’으로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한 시즌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하는 것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인간들의 보편적 가치 가운데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적이며 신묘막측하여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❹ 관련 자료 – 머니투데이 ‘태풍 피해’ 일본 아오모리현 한 농부의 선택-1
우리는 늘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뭔가를 선택해서 도전하기보다 보편적인 상황에 순응하는 경우가 많다. 좌절과 실패도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만 한다. 사실 세상에 주어지는 어떤 상황도 어떻게 선택하고 창의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냐에 따라 실패나 위기도 성공과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 아오모리 현의 한 농부의 이야기다. 태풍이 심하게 불어 대부분의 사과가 떨어졌을 때의 일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농부는 실망하고 힘겨워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 농부는 재미있는 발상을 하나 했다. 남은 사과를 포장해 정상 가격의 2-3배 높은 가격으로 백화점에서 판매를 한 것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을 타깃으로 한 것이다. 태풍에도 끄떡없이 견딘 사과이니 대학에도 떨어지지 않고 잘 붙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아서 판 것이다.
사과 자체를 판다는 발상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태풍 피해에 좌절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농부는 사과에 담긴 스토리를 팔 발상은 한 덕분에 태풍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그냥 사과 하나를 산 게 아니라 모진 태풍에서 끈질기게 붙어있는 사과의 끈기와 생명력을 산 것이고, 그 사과가 주는 행운까지 함께 산 것이다. 특별한 의미를 담은 창의적인 제품은 시장의 보편적 가격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농부지만 그에겐 탁월한 비즈니스 창의력이 있었던 셈이고, 그의 선택은 정말 창의적이었다.
설명 :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는 신묘막측을 ‘고난을 기회로 역전시키는’ 예로 추상적 개념을 실생활의 예로 들어주는 관점에서 ‘아모모리현 농부와 민들레영토’ 예화를 추천드립니다.
❺ 관련 자료 – 머니투데이 ‘태풍 피해’ 일본 아오모리현 한 농부의 선택-2
우리나라는 유독 자영업자가 많다. 취업이 힘들어서, 퇴직 후 새로운 경제활동을 위해서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공하는 사람보다 망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지나가다보면 왜 저기에 저런 걸 차렸나 안쓰럽기까지 한 가게들도 많다. 망하려고 작정한 것도 아닐 텐데, 너무나 창의력이 없어서 너무도 뻔한 장사만 시도한다. 자영업자들에게도 창의력은 아주 필수적이다.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보자. 민들레영토는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공간을 판다. 원래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처음 장사를 하려고 계약을 했는데 하필 무허가 건물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커피를 팔려면 정식 영업허가가 필요했다. 그 건물은 영업허가가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포기하고 좌절할 텐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커피 대신 공간을 팔기 위해 입장료를 받았다.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니 법적인 문제도 해결되고, 장사도 한 셈이다. 다른 카페들과의 차별화도 확실히 가져올 수 있었다. 약점에서 발상을 바꿔서 강점을 이끌어낸 것이다. 커뮤니티공간을 파는 비즈니스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민들레영토를 벤치마킹한 수많은 공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카페는 원래부터 있었지만, 카페가 아닌 커뮤니티 공간을 통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그냥 포기하고 좌절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역발상이자 창의적 선택을 하면 위기마저도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의 마음과 뜻과 관심을 헤아리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적인 결속과 결합, 즉 온전한 연합의 관계입니다.
❻ 관련 설교 – 2019 종교에서 관계로 종교인가, 관계인가_관계를 Change하라
처음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너무 좋아서 누군가에게 알려주려고 ‘하나님 섬기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우리가 그 규칙을 지키는 기계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종교적 규칙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찬양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나요?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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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교적으로 행함
종교적 행위는 자신을 주도권을 가지며 하나님을 통제하려 합니다. 나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결과들을 애써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선을 행하며 도덕적으로 살았더니 잘 되더라 하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 합니다.
내 방식의 사랑과 호의가 상대방을 기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사랑으로 대할 때 깊은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종교행위입니다.
2.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아침 이슬 같도다.”(호6:4) 말씀하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말씀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자비와 사랑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뜻을 알고 행함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을 힘써 알게 하며 “그의 나타나심이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소리 없이 깊은 사랑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적이며 신묘막측하여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 넘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마음과 뜻과 관심을 헤아리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심을 헤아리는 행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규정짓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감정과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사랑이란 걸 해놓고 그 사랑을 몰라준다고 원망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때론 그 사랑은 폭력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도록 힘껏 알도록 지혜와 분별력을 주소서.
요즘 교회에서 눈물을 많이 흘린다. 많이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목사님 말씀을 듣고 언급된 성경 말씀에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오늘도 그렇다. 지금 이시간 예배가 끝나고 혼자서 찌질하게 이러고 있으니...
지금까지 무심히도 지나쳤던 QT 배너를 그냥 눌러 보았다. 그 중에 묵상 노트라고 하며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모든 잠김에서 열림의 시작은
하나님을 찾았을 때부터 시작된 것같다.
그러나 내가 찾기전에 하나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셨나보다.
'하니님도 참, 나한테 원망을
더럽게 듣고도
끝까지 사랑을 주신다.'
이 부분을 보는데 또 눈물이 난다. 세상을 짧게 살았다는 말을 듣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영혼은 어린 아이인가 싶다. 나도 참 그 분을 수없이 속이고 기망하고 약속도 많이 어기고 또 이번만 들어 달라고 매달리기를 수없이 많이 했다. 사실은 지금도 그러고 있는 줄 모르겠다.
사실 반성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또 칭얼거리고 약속하고 한번만 봐 달라고 애원하기를 반복하며 살아 왔다. 이 정도 되면 용서할 수 없는 전과자다. 그 순간만 넘기려 거짓으로 뉘우치는 반성문을 제출해 형량을 줄이고 풀려 나서는 또 같은 죄를 짓는 파렴치한 범죄자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더한 인간이다.
이런 죄인에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똑 속아 줄 준비가 되었는 그 분, 또 벌써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나! 그런 내가 보기에는 그분은 호가 필요하다.
바보! 바보 하나님이다.
그래도 언제나 무섭다. 언제쯤 그 분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