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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

4월 2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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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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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군가의 삶을 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죽음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채 마지막으로 하신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삶을 사셨는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무엇을 위함이었는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가장 어려워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사람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억울하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내가 그래야 하지?’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조금 버겁거나 힘든 일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 혹은 수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용서에는 아픔과 눈물이 동반됩니다.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는 고통일 것입니다. 상대방이나 상황이 변할 것 같지 않아 두려울 것입니다. 반복되는 용서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됩니다. 지치고 상처받습니다. 왜 나만 용서하라고 하는지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절망하며 울부짖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 위임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위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나는 용서의 첫발을 내딛습니까?

❶ 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❷ 용서의 첫걸음, 하나님께 간구하며 위임합니까?


묵상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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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❶ 관련 예화 – 용서에 프로는 없다, 노마 스티브 전 위클리프 선교사, 『목회와 신학』 2004년 2월호 

 

루이스 스메디스(Lewis Smedes)는 저서 『Forgive & Forget(용서와 망각)』에서 “우리를 상처 준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었어. 그리고 왜 그렇게 했을까”라 생각하며 그에 대해 추리한다고 지적한다. 추리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참한 감옥에 있게 된다. 용서와 화해는 복잡하고 하기 힘든 것이다.  

 

왜 힘든가?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우리 맘대로 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에 더 많은 것이 있다. 용서하지 않는 영성을 가지고 있는 한 비통의 쓴 뿌리가 남아있고 불쑥불쑥 올라올 것이다. 상처 입은 기억을 재생할수록 점점 더 크게 부풀러진다. 만약 우리 삶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해가 갈수록 그것이 우리를 소진시킬 것이다. 

 

미국 적십자의 창시자 클라라 바르톤(Clara Barton)이 예전에 자신을 비난한 사람과 만났다. 그녀는 마치 그것을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친구가 “너를 곤경에 빠뜨린 그 사건 기억나지 않아?”고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에 아마추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반복해서 용서하면서 쓴 뿌리가 자라지 않도록 했다.  

 

누군가를 마음을 다잡으면서 힘겹게 용서해 본 적이 있는가? 비록 당신이 겨우 일시적으로 용서를 했고, 오늘 용서하고 내일 미워할지라도 그날 이후 반복적으로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용서의 사람이 된다.  

용서해야 할 순간이 올 때 우리 대부분은 아마추어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❷ 관련 설교 – 2010 변화산 용서와 포옹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용서해야 하는가?” 

한 가지 변함없는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용서하지 않는 한은 어떤 치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용서는 죄의 책임에서 면제해 주는 것 이상의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면제해 준다고 하는 것은 그의 실수를 눈감아 주고, 그것에 대해 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를 말할 때는, 실패나 죄를 용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감싸주고, 다시 일으키고, 회복시켜 주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렇게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라고 합니다.  

하나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음에도 그 사랑의 감격을 곧 잊은 채 포악한 옛사람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임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도덕성에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함으로써만 우리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용서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됩니다. 지치고 상처받습니다. 왜 나만 용서하라고 하는지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❸ 관련 설교 – 2010 변화산 용서와 포옹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단지 상처를 입힐 뿐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크리스천을 죽이는 것은 다른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들은 용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쫓아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인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못질을 하다, 손을 때려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픕니까?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렸지만, 오른 손을 곧 망치를 내려놓고 왼손을 감싸 쥡니다. 그리고 그 왼손도 오른 손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을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체인 한 용서와 포옹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용서하고 포옹하지 못하므로,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며, 당신이 용서하지 못하므로 당신이 괴로워하면서 당신의 영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용서해야합니다.  

만일 다윗이 므비보셋을 품어주지 못했으면 그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두발이 다 절뚝발이 입니다. 게다가 왕의 정적의 아들이니, 그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용서는 살리는 일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용서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위임하는 것입니다. 

❹ 관련 설교 –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라, 존 파이퍼 설교, 목회와 신학 2009년 8월호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용서를 가능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악하게 행한 그들을 용서하게 하는 자유와 능력과 동기를 주는 것일까요? 아마도 여러분 중 누군가는 도저히 용서란 나에게 기적과 같이 불가능한 것이라 느낄 만큼 부당하게 대우받고 깊이 상처받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존 번연의 이 짤막한 시 하나를 여기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달려라 존, 달려라. 율법은 우리에게 달리라 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 하도록 손이나 발이 되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은 이보다 더 복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다. 

그것은 우리에게 비상하라 명하시고 그리할 수 있는 날개를 주신다. 

여섯 개의 깃털로 된 두 개의 날개를… 

 

여기에서 용서란 결국 ‘비상’을 의미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이 복음의 날개를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 주시길 빕니다. 용서란 복음의 능력 안에서 당신에게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쪽 편마다 각각 세 개의 깃털로 된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두 날개, 그리고 여섯 개의 깃털’ 

저는 이 여섯 개의 깃털을 에베소서 구절에서 발견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 5장 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에 새의 두 날개처럼 복음을 통해 날아오르는 용서의 두 날개가 있습니다. 각각의 날개는 여섯 개의 깃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여섯 개의 깃털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홀로 하신 은혜의 사역들입니다. 저는 오늘 믿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아직 믿음에 이르지 못하신 분들이라도 오늘 이 말씀을 유념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복음의 용서하는 능력이란 불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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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창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1. 아버지
아버지란 이름은 육신의 아버지 또는 영적인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보호자이며 사랑해 주시는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신뢰하는 아버지로 존경하며 경외의 대상입니다. 항상 아들과 함께 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리하여 효도하는 것이 인생의 근본이며 잘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영적인 아버지임을 깨달아 믿고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거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이므로 아버지와 동등함이 되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며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받아 자라게 하여 믿음이 성숙되는 성도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2023.04.03
최주창
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인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자신은 이웃의 죄를 위해 죽을지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대속의 희생은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시킵니다.

죽음의 순간에 아버지를 부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채 마지막으로 가상칠언 일곱 번 말씀을 봅니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②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26-27)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15:34)
⑤ 내가 목마르다.(요19:28)
⑥ 다 이루었다.(요19:30)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임종 때 예수가 한 말입니다.

가상칠언은 고독한 삶, 목마른 삶, 긍휼의 삶. 용서의 삶, 사랑의 삶, 구원의 삶 등 우리를 위한 삶을 십자가를 통하여 인생이 어떻게 살고 어디로 가며 무엇을 만족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삶의 참된 믿음의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은 용서였습니다.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가장 어려워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고 말씀하십니다.

왜 나만 용서하라고 하는지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절망하고 울부짖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하나님께 위임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위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용서와 사랑함에 순종의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4.03
김은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억울하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내가 그래야 하지?’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조금 버겁거나 힘든 일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 혹은 수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용서에는 아픔과 눈물이 동반됩니다.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는 고통일 것입니다. 상대방이나 상황이 변할 것 같지 않아 두려울 것입니다. 반복되는 용서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됩니다. 지치고 상처받습니다. 왜 나만 용서하라고 하는지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절망하며 울부짖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 위임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첫걸음은 하나님께 간구하고 위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묵상글은 내가 쓴 것 같습니다.
결혼 후에 인생의 가장 어렵고 힘든 게 뭔가라고 묻는다면 용서라고 답할 정도로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용납이 안되는 게 사실입니다.
며칠 전 아들과 나눴던 대화처럼 아직 처절한 배신 당함의 경험이 없이 세상살이가 할만 한 아들은 자존심때문에 사과가 어렵지만 여전히 쓴뿌리가 되어 남아있는 가슴을 새까맣게 태운 배신의 상처로 용서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데~~이번에도 같은 답을 주십니다.
니가 하려고 하면 어렵다고...
온전히 하나님께 위임해야 한다고...

하루를 시작하며 혼잣말처럼 하는 기도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제게 일용할 사랑과 긍휼함을 주세요,"
내일부터는 한가지 추가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낼 수 있도록 용서할 마음도 주세요."라고~~
20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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