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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

4월 1일 십자가 앞,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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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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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지막까지 예수님 곁에 남은 이들은 소수였습니다.

열광하던 무리는 물론이고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믿음의 동역자도 예수님께 등 돌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끝까지 남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본질입니까, 비본질입니까?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포와 가르침, 그분이 이루신 구원, 그분의 명령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십자가와 부활,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이 중에 무엇을 취사선택할 수 없습니다. 부활과 승리만 선포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와 죽음이 먼저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관식을 치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왕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군인들이 도열했으나 그분을 조롱하기 위함이었고, 광채 나는 관 대신 가시가 뻗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주님의 손에는 왕의 규 대신 갈대가 들렸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나는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우리 안에 여러 모습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배신한 제자, 조롱하는 군중, 눈물짓는 여인들, 그분을 못 박는 병사들. 예수님과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고 무시했던 나,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여겼던 내가 바로 십자가 주변을 둘러싼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갈 ‘한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으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❶ 나의 과거 모습, 현재 모습은 어떻습니까?

❷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결과를 바랍니까?


묵상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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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끝까지 남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본질입니까, 비본질입니까?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아마도 베로니카보다 베로니카의 veil이 더 유명하게 되었던 것은 veil 에 imprint된 예수님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안겨주고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중세시대에 가짜 유물들이 많이 제작된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유물을 우상처럼 의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은 베로니카의 믿음보다는 베로니카의 veil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베로니카는 멀리 떨어져서 주님을 바라보기만 했던 자들과는 달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베로니카의 ‘veil’ 은 그녀의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면서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 수건을 보면 우리에게도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결과에 집중할 때,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믿음을 놓치게 됩니다.  

 

 

부활과 승리만 선포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와 죽음이 먼저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십자가가 능력인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이 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지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십자가의 진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왜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까요? 

우리에게 죄가 들어와 더 이상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나 수난절을 기념하고 난 후 부활절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념에서 ‘나’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들이 생각했던 왕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군인들이 도열했으나 그분을 조롱하기 위함이었고, 광채 나는 관 대신 가시가 뻗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주님의 손에는 왕의 규 대신 갈대가 들렸습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이 홍포는 로마 군인들이 쓰고 있던 망토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군인들은 예수에게 홍포를 입힘으로써 군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군인 예수’는 그에게 몰려든 군대를 이끌고 유대인의 왕이 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예수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다. ‘너를 무장시켰고 군대도 모았으니, 어디 한번 왕으로 궐기해 보시지’ 라는 모욕적인 뜻이 담겨 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가시관을 씌웠다는 것은 계속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예수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관을 가시나무로 만든 것은 가시가 광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광채 나는 관을 씌움으로서 그를 왕처럼 분장시킨 것이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갈대를 오른손에 잡게 한 것은 ‘홀’을 잡고 있는 것처럼 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두 가지를 독자에게 원한다. 

하나는 예수의 눈물겨운 수욕의 장면을 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이야기 속에서 큰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무지한 로마 군인들이 몰라서 예수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고 있지만, 예수는 홍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시고 임금으로서의 홀을 드신 진정한 왕이라는 것이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갈 ‘한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으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십자가의 능력은 구경꾼처럼 치욕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멜 깁슨이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유대인 단체에서 심각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의 중요한 요인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였기 때문이었죠. 

“그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우리 유대인들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멜 깁슨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깊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흉악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는 모습들 가운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애통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저는 2018년 고베 BTD를 인도하는 가운데 썼습니다. 일본 크리스천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곡하게 하시도록 기도하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통곡하는 자들을 통해,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통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애통함이 먼저입니다. 

애통함이 없는 죄 사함은 ‘착각’이나 자의적 ‘위안’ 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가 나가 설교할 때,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십자가 앞에 서있는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회개하고 애통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강하게 체험합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비기독교적인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복음을 놓치고 있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죠.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밀양>을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빈정거림이 나옵니다. 전도연 씨가 열연한 주인공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아들을 데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슬픔과 번민에 휩싸인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신대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애가 유괴범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 고 하자 유괴범은 너무나 평안한 얼굴을 한 채 “나는 용서받았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충격을 받고 교도소를 나와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였느냐?”는 겁니다. 그 후 영화는 내내 신애의 방황을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죄 사람을 받았다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의 믿음을 이렇게 빈정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용서 받았다.’ 면서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도 없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는 고백 한 마디 없는 살인자, 그가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파사드 7) 믿음을 가지는 것과 믿음의 결과를 바라는 것의 차이 

지금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는 자가 ‘나’ 임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3장 7-1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질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7b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래전 옥한흠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기독교는 천박한 기독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우리들에게 더 이상 눈물이 없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애통함이 없는 십자가는 천박한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애통함이 없다는 것은 십자가가 우리의 신앙에서 객관화되고, 상대화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십자가의 진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인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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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창
십자가 앞, 나는 누구인가?

1. 옛 사람이~
십자가 앞 나는 죄인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삶속에서 나의 행함과 말 속에서 날마다 거짓말 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나의 삶을 관찰해 보면 미세하여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람들에게 공포해도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식사 했느냐고 물으면 밥을 먹지 않고서도 밥 먹었습니다. 하고 쉽게 대답합니다. 또한 언제 커피 한잔 먹자고 하면서 커피를 사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작든 크든 죄이며 죄인이 됩니다. 세미한 죄까지 고백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나의 행함을 관찰하여 마음속으로 죄를 고백하는 좋은 습관으로 행하여야 나의 마음이 그나마 깨끗해져 거룩함에 접근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달프며 공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빌고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 죄수의 심정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하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용서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진리로 새 사람이 되어 거듭남으로 부활이 되어서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져 실제로 현세 천국의 삶으로 행복해집니다.
2023.04.02
최주창

2.새 사람으로
믿음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의 선포와 가르침, 그분이 이루신 구원, 그분의 명령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십자가와 부활,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십자가와 육신의 죄가 죽음으로 거듭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관식을 치르셨습니다. 광채 나는 관 대신 가시가 뻗친 가시면류관을 스셨습니다. 주님의 손에는 왕의 규 대신 갈대가 들렸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나는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을까? 우리 안에는 여러 모습들이 있습니다.
옛 사람으로 예수님과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고 무시했던 나가 바로 십자가 주변을 둘러싼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갈 한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으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 거듭난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4.01
김은실
[나는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우리 안에 여러 모습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배신한 제자, 조롱하는 군중, 눈물짓는 여인들, 그분을 못 박는 병사들. 예수님과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고 무시했던 나,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여겼던 내가 바로 십자가 주변을 둘러싼 무리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갈 ‘한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으로 인해 십자가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피치못할 상황이나 힘든 인간관계나 악조건의 사역지를 만나게 되면 이게 내가 져야할 십자가인가?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던 죄인이 바로 접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했던 내가 신앙의 연륜이 생겼다고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기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나이 헛먹지 않아서 고맙고 믿음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부정하지 않고 고난도 수긍하며 환난 중에도 평안할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믿음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늘 갈망함으로,나같은 천한 자를 양자 삼으시려 신이신 예수님 친자를 죽게 하신 그 사랑 전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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