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을 때, 우리는 ‘후회’합니다.
베드로의 통곡에는 후회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 없다는 책망을 들었지만,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걸어갔던 제자는 베드로가 유일했습니다(마 14:29).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용감하게 무덤 안을 들여다봤던 제자도 베드로입니다(눅 24:12).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는 열정의 아이콘인 동시에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열정과 배신은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열정 없는 사람에게는 배신이란 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enthusiasm’은 ‘en’과 ‘theos’의 결합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열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벗어난 왜곡된 열정들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롬 10:2).
하나님을 향한 열정인 듯 보이나 실상은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열심과 열정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저 부인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 베드로의 열정은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배신으로 급선회했습니다. 닭이 울고,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베드로의 어둠이 빛 가운데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통곡했습니다. 끝까지 스스로 모든 짐을 지고 자살한 가롯 유다와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과거 사건으로 발목 잡을 시선들과 스스로의 수치로부터 베드로를 건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는 사명을 회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베드로의 열정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베드로는 이로써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기까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바른 열정을 가졌습니까?
❶ 하나님 안에 있는 바른 열정입니까?
❷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기반을 둔 열정입니까?
즉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열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벗어난 왜곡된 열정들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롬 10:2). 하나님을 향한 열정인 듯 보이나 실상은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열심과 열정일 수 있습니다.
❶ 관련 설교 – 2019 수난의 피사드, 열정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 중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상업주의 속에서 사는 우리는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이 있을 때 헌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기보다 저 자신을 더 위합니다. 저는 주님의 전시장에 놓여서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들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 참된 헌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모든 인격 속에서 최고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는 사명을 회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베드로의 열정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베드로는 이로써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기까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❷ 관련 설교 – 2019 수난의 피드사, 열정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 중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잘못된 열정을 가진 베드로의 배신과 아픔뿐만 아니라, 식지 않는 열정으로 배신한 베드로를 찾아가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요,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끝까지 찾아가셔서 그가 했던 고백대로 살아가도록 만드셨던 분이 우리 하나님이세요.
어떤 목사님의 책을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요나서를 보면서 사람들은 요나의 ‘불순종’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요나서에는 하나님의 열정이 나와 있다고 말입니다.
선지자로 택함 받은 요나를 끝까지 붙잡으시고 추적하시며 사용하시는 열정, 그리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영적인 열불!”
베드로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열정’이 방향을 바로 잡으면 무섭게 타오르는 불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의 열정 앞에 다시 선 베드로는 결국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신’은 ‘충성’의 다른 면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열정과 배신, 동전의 양면
열정은
삶의 에너지로 우리 자신의 최상의 모습을 가지며 우리의 가장 긍정적인 삶을 살기위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을 위해 용감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정은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매우 강렬한 존재로 깊이 인식한 감정과 애정을 줍니다.
베드로의 긍정적인 면은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걸어갔던 제자는 베드로가 유일하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용감하게 무덤 안을 들여다봤던 제자도 베드로입니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열정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배신행위는 근원적 원인은 생존의 본능으로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긍정의 열정이 변하여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정의 감정을 갖는 마음의 행함이 믿음을 등져 배신하게 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배신이란 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왜곡된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인 듯 보이나 실상은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열심과 열정이 믿음을 배신하게 합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열정은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배신으로 급선회했습니다.
닭이 울고, 아침이 밝아 왔습니다. 베드로의 어두움이 빛 가운데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대성통곡 했습니다 깊은 후회를 합니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었으나 예수님을 세 번 다 부인했습니다.
수치스런 베드로의 부정의 마음을 예수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베드로는 사명을 회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배신한 베드로의 열정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게 합니다.
의로운 사명을 가진 믿음의 열정을 자기 욕심으로 배신하여 하나님을 벗어나는 행동으로 믿음을 배신하는 삶이 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못임을 깨달았을 때,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켜 회개한 것과 후회하면서도 끝내 용서를 구할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아들하고 대화하다가 \"엄마는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게 더 어려운 일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인 아들로서는 자존심때문에 사과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 묵상 내용과 아들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면 용서든 사과든...하나님 안에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정과 배신이 동전의 양면과 같듯이 인생의 많은 선택지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순간 분명히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는데 마음에 겹겹이 쌓인 세상적 가치와 욕심,이기심 때문에 가룟 유다와 같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우매한 인생입니다.
주 안에 있는 것만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주님!
제가 어떤 유혹과 시련 가운데 놓이더라도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땅에서의 작은 유익에 진정한 보화를 맞바꾸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저를 늘 통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