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에게는 돌이킬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암시적으로도 명시적으로도 유다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자 적들과 은밀히 흥정하고(마26:14-16) 실행함으로써(마 26:47-50) 멸망의 자식이요(요17:12), 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요6:70).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마 26:15).
무슨 권리로 예수님을 넘겨주고 돈을 받았을까요?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소견대로 판단하고 처분한 것입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게 되었는지에 관한 여러 추정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뜻과 기대와 이상과는 다른 존재라고 결론 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3년을 동고동락했고, 열두 제자 중 하나였지만 유다는 자기 정체성도,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의 정체도 알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만의 예수님 상을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대와 이상을 투영한 우상으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였으나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와 사역을 드러내셨을 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립니다. 유다가 판 것은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뒤늦게 뉘우치며 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려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그는 결국 믿음도 돈도 생명도 모두 잃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마 26:14).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열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다도 처음엔 예수님의 성실한 제자였습니다. 과거의 나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 앞으로의 나’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까, 선생으로 고백합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나도 언젠가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제자입니까?
❶ 그동안 나는 어떤 제자였습니까?
❷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자 적들과 은밀히 흥정하고 실행함으로써, 멸망의 자식이요 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❶ 관련설교 – 2019 수난의 파사드. 2)유다의 배신, 그리고 나
유다는 자신이 계획한 인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에 그렇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결국 예수를 팔아버린 인생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로 마감하게 되었고,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인류 역사에서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신하기 전까지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암시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유다를 지적해 주셨지만, 사랑과 긍휼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여러 번 주셨던 주님의 은총을 저버리고 결국 배신합니다.
예수님께 실망한 유다는 물질에 완전히 눈이 멀어버림으로써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팔려고 대적들과 은밀하게 흥정하고(마26:14-16), 그것을 실행함으로써(마26:47-50), 결국 멸망의 자식(요17:12)이요, 마귀(요6:70)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정죄되어 부당하게 사형을 선고받자 무죄한 스승을 판 일로 괴로워하다가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마27:3-5)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소견대로 판단하고 처분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뜻과 기대와 이상과는 다른 존재라고 결론 낸 것입니다.
❷ 관련설교 – 2019 수난의 파사드. 2)유다의 배신, 그리고 나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요?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주’고 고백하지 못하는 인생이었던 것이죠.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그이 마음에는 늘 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귀가 유혹할 틈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주’가 되시면 순종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사단이 들어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면 ‘교만’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교만은 순종의 대척점에 서 있고, 순종하는 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기 때문이죠.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 돈을 얻었지만, 그 돈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제자장의 뜰에 돈을 던지고 갔지만, 사실은 돈에 버림받은 비참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죠. 우상숭배자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고 얻으려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인생은 무엇을 해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에 주인으로 거하는 한, 어떤 사단의 유혹도 우리들에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대와 이상을 투영한 우상으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제자였으나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열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다도 처음엔 예수님의 성실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나도 언젠가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❸ 관련설교 – 2019 수난의 파사드. 2)유다의 배신, 그리고 나
우리는 유다의 배신이 결국은 ‘우상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배신하는 행위들이 우상숭배라는 동일 선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죠.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심한 유다는 이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기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무슨 권리로 예수님을 넘겨주고 돈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걸까요? 어쩌면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를 파는 배신자들의 전형적인 특성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된 자신이 예수님을 마음대로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는 것이죠.
유다의 마음속에서부터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필요했던 존재에서, 자신의 성공에 필요가 없으니 마땅한 대가를 받고 넘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러 왔는데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들이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그가 생각했던 정치적인 이상, 그가 생각했던 예수님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포기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파는 장면에서 왜 ‘열둘 중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러고 생각해보니 제자들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긴 모습대로 예수님을 따랐고, 헌신했고, 배신했고, 끝까지 순교합니다. 배신자 유다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는 배신하기 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 명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부류에 속했던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구냐를 묻고 있습니다.
❹ 관련예화 (『나의 끝, 예수의 시작』 카일 아이들먼, 두란노, 16.01.08)
“안락한 여정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뿌리째 뒤흔드신다.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가 한 번도 쓴 적이 없던 마음의 안경을 통해 보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그분처럼 생각하기 위한 열쇠는 철저한 항복이다. 이제껏 통하지도 않았던 옛 방식을 고집스레 붙잡고 있지 말고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누가 가장 큰지를 놓고 말다툼을 벌여 예수님을 실망시켰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세 번이다. 그들은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라고 가르치고 매일 몸소 종의 본을 보여 주신 스승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형성되어 온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융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끝에 이르려면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나의 끝에 이르는 여행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제자들에게 이것은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인가, 자신에 대해서 죽을 것인가! 그들은 양단간에 선택해야 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선택을 요구하신다.
요13장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하신다. 가장 높은 분의 지극히 겸손한 행동보다 더 강력한 설교는 없다. 스승이 제자를 섬기는 것 자체도 이상하지만, 이 장면은 정말 더 이상하다.
전부를 쏟아 사랑하고 가르쳤지만 결국 위험의 조짐이 보이자마자 스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칠 자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가룟 유다는 돈 몇 푼에 스승을 팔 것이다. 베드로는 제 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던 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발뺌할 것이다. 3년간 수많은 무리를 가르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리셨던 분이 얼마 있으면 겨우 요한과 몇몇 여인만 따르는 가운데 불명예스러운 처형 장소로 끌려갈 것이다. 미친 듯이 열광하던 군중은 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롱하는 자들과 피에 굶주린 자들의 손에 넘겨질 시간이 왔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당신과 나 같으면 보나마나 도망쳤을 것이다. 우리를 죽이려는 자들을 혼내 주기 위해 힘을 남용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제자들을 한바탕 꾸짖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아 주셨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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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열둘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순수하고 성실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대와 이상을 투영한 우상으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핍박 받고 긍휼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인내하는 참된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 합니다 즉 예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열둘 제자 중 특히 가룟 유다는 긍휼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이 자기 뜻과 기대와 이상과는 다른 존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지만 자기 정체성도,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의 정체성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와 사역을 드러내셨을 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을 받고 진리의 영을 팔았습니다. 굶 주림에 자신을 판 것과 같습니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진리도 은혜도 사랑도 팔고 믿음과 돈도 생명도 모두 잃었습니다.
과거의 나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나 앞으로 “나”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3년 공생애 동안 섬김과 희생과 낮아짐으로 그렇게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어도 유다는 자기 프레임에 갇혀 듣고싶은대로 듣고 보고싶은 것만 보며 자기 생각에 함몰되어 주님을 선생 정도로 취급하며 자기만의 우상을 늘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인생은 무엇을 해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에 주인으로 거하는 한, 어떤 사단의 유혹도 우리들에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였지만 열둘 중에 섞여있었던 목적이 달랐고 자기 생각에 짜맞추어질 메시아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탄의 졸개가 되어버림을 봅니다.
분별의 영을 구합니다.
내 좁은 소견에 옳은 편견이나 내 필요에 의한 주인을 따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결단코 범하지 않도록 주님! 똑바로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