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 Home
  • >
  • QT
  • >
  • 3월 27일 나는 아니지요?
이전으로
2023년 03월 27일 월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3년 03월 27일 월요일
다음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

3월 27일 나는 아니지요?

통독표
video poster
마태복음 26:20-30
펼치기/접기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예수님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나는 아니지요?”하고 물었지만, 예수님을 팔게 될 당사자 유다는 그저 ‘대답’하는 수준으로 반응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르지만, 유다는 ‘랍비여’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객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선생’인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주님’(master)입니까 ‘선생’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엄중한 명령으로 받지만, ‘선생’의 말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됩니다. 주님을 배신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지만, 선생을 바꾸는 것은 선택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나 심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걱정하는 제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아니지요?”(Surely not I, Lord?, NIV)라고 묻고 있습니다. 잠시 후 일어날 일들로 보건대 그들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이렇게 물어야만 했습니다. “혹시 제가 그 사람입니까?”

제자들은 왜 자신은 아니라고 확신했을까요?

어쩌면 확신이 아니라 불안함을 감추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간의 성품이나 행적을 떠올리며 가능성 있는 범인을 추리고, 애써 나일 가능성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죄는 그의 죄이며, 나의 죄는 나의 죄입니다. 결국, 범인은 가룟 유다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마 26:25). 예수님의 대답은 가룟 유다에게뿐 아니라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던 모든 제자를 향한 답변 아니었을까요?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❶ 주님입니까, 선생입니까?

❷ 나는 본문 중 어떤 제자에 가깝습니까?


묵상 도움글
펼치기/접기

다른 제자들은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르지만, 유다는 ‘랍비여’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객관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선생’인 것입니다. 

❶ 관련설교 – 2019 수난의 파사드. 1) 최후의 만찬에서-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반응합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두 번의 반문이 마태복음 26장 22절과 2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최후의 만찬에서도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제자들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어있기는 해도 제자들은 ‘근심하여’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파는 유다는 그저 ‘대답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한 손에는 돈을 쥐고,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걱정되어 주님께 묻는 것은 ‘주여!’라고 묻는 물음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떻게 자신들의 주인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다는 ‘랍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서 객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선생’일 뿐입니다. 그러니 조금은 무관심하고 냉담하게 묻고 있지 않을까요? 

‘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명령이지만, 

‘선생’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선택’이 아닌지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엄중한 명령으로 받지만, ‘선생’의 말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됩니다. 주님을 배신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지만, 선생을 바꾸는 것은 선택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관련설교 – 2019 수난의 파사드. 1) 최후의 만찬에서-나는 아니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아주 중요한 상상 혹은 ‘묵상’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냐에 상관없이 모두가 자신의 문제가 아닌 상대방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들의 표정이 화가 났든, 근심을 하고 있든, 무관심하든, 예수님을 파는 자일지도 모르는 상대방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죠. NIV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Surely not I, Lord?” 그리고  “Surely not I, Rabbi?”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유다가 예수님을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주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십자가 지시는 주님을 다 떠나갈 제자들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오히려 근심하며 ‘그 사람이 저입니까?’라고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얄팍한 시도이고, 자신의 연약함과 약점을 감추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부정하기 위해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확신이 아니라 불안함을 감추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간의 성품이나 행적을 떠올리며 가능성 있는 범인을 추리고, 애써 나일 가능성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관련예화 – 2019 수난의 파사드. 1) 최후의 만찬에서-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왜 자신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았을까요? 혹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자신들 마음속에 있는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의도였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 스스로 위로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을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다른 제자들의 과거 행적들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실수했거나, 부족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자신은 아니라고 위안을 받았을 것이고,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하리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수와 단점, 혹은 험담을 함으로써 자신의 단점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과장해서 지적하면, 우리가 했던 실수를 기억하지 않을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정죄’의 들보를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베푸신 마지막 만찬의 자리가 위로와 평화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배신과 경계의 눈초리로 서로를 보게 된 이유가 상대방을 향한 ‘정죄의 들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련예화 (『나의 끝, 예수의 시작』 카일 아이들먼, 두란노, 16.01.08) 

“내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른 사람의 흠을 찾아내는 시력이 좌우 2.0인 바리새인이 애용하는 표현이다. 바리새인은 주변에서 문제를 찾을 뿐 거울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교만이 눈을 멀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자신의 교만을 보지 못하는 건 바로…… 자기 교만 때문이다. 

 

지난주에 아이들을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아홉 살 먹은 아들이 뜨끔한 질문을 던졌다.  

“아빠, 왜 맨날 다른 운전자들에게 뭐라고 말해요? 어차피 듣지도 못하잖아요.” 

다른 운전자들이 듣지 못해도 아들이 듣는다. 그런데 아들이 들은 말은 다른 운전자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잘못된 운전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말도 아니었다. 늘 다른 운전자의 잘못을 격하게 지적하는 말이었다. 이렇듯 나는 남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금방 알아차리지만 내 잘못은 잘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내 아들이 들은 말은 내 운전에 대해 자신하고 남들의 운전은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말이었다. 

내 자동차 유리는 다른 운전자들의 무개념 운전을 확대해서 보여 준다. 내 차에는 내 차만 빼고 다른 모든 차를 보여 주는 커다란 창문이 사방에 달려 있다. 나를 보여 주는 건 작은 거울 하나뿐이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잘 대해준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정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자신을 가장 먼저 챙기고 어디서든 일등이 되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보다 남들을 더 소중히 여기면 어떨까? 식사 메뉴를 친구에게 고르라고 한다든지, 내 말만 하지 말고 배우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 친척이 도움을 요청하면 아무리 귀찮은 일이라고 해도 발 벗고 나서면 어떨까? 맨 앞자리나 가장 큰 파이, 가장 좋은 경관, 가장 큰 상을 놓고 싸우지 말고 서로 양보하면 어떨까? 나를 낮추려면 누가 봐도 나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을 나보다 상석에 앉혀야 한다. 

 

익명으로 나누면 남들의 감사나 높임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이 낮아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또 희생적으로 베풀면, 즉 부담이 갈 정도로 베풀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실한 고백이다. 그렇게 베풀 때마다 내 삶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겸손의 최고봉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낮추셨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그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겸손마저도 자기 성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8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댓글을 통한 금전요구는 사기성 스팸입니다.
Download
PDF 다운로드
묵상 일기
0 / 5,000
묵상 나눔
최주창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배신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불안하여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팔 유다는 예수님을 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화 된 랍비여 하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느냐 또는 랍비여 즉 선생님 하고 부르느냐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은 엄중한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만 선생님의 말은 취사선택의 대상이 됩니다.
죽 예수님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그냥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하는 말은 어쩌면 확신이 아니라 불안함을 감추려는 의도였는지 모릅니다.
그간의 성품이나 행적을 떠올리며 가능성 있는 범인을 추리고 애써 나일 가능성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법인은 랍비라는 말로 이미 범인은 밝혀집니다.

나는 아니지요 묻는 것이 아니요 나의 주님이여 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이 주가 되어 사는 삶이 중요한 선택에 의하여 결정 됩니다. 주된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3.28
삭제된 묵상입니다.
김은실
[내 자동차 유리는 다른 운전자들의 무개념 운전을 확대해서 보여 준다. 내 차에는 내 차만 빼고 다른 모든 차를 보여 주는 커다란 창문이 사방에 달려 있다. 나를 보여 주는 건 작은 거울 하나뿐이다. ]
오늘 묵상을 하며 목사님이 읽어주신 카일 아이들먼의 일화 속 내용이 딱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타인이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것을 머릿속에 주입하려는 훈련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기 전에 그런 언행을 한 배경이나 그 사람의 상황을 먼저 따져봐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많이 궁시렁댑니다.
옆자리에 대부분 딸아이가 앉아 있는데...욕은 아니지만 상대차주가 듣지도 못하는 궁시렁거림을 듣던 딸도 뭐라고 혼자 열을 내느냐고 한번씩 쓴소리를 합니다.
돌이켜보면~~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사고방식이 습관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자들처럼...자신들은 자기자신을 더 잘 알지만 안그런 척 하는 다반사의 삶의 방식이 부끄럽습니다.
내로남불의 삶, 남의 티끌을 굳이 찾아내며 나의 정당성을 밝히려는 추한 삶을 청산하고 싶습니다.
주님!
주의 제자로 자녀로 똑바로 살기 원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2023.03.27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