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라함’과 ‘헤세드’입니다.
‘라함’은 ‘슬픔, 애통’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나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세드’는 공감을 넘어 실제 행동을 통해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표현할 때도 헤세드를 씁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마 5:7, 《메시지》 성경). 남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과 관계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돌보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긍휼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긍휼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랑은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웃 사랑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면, 참된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동전 한 개,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관점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합니다. 창녀, 세리, 죄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마음이 나에게도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습니까?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긍휼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까?
❶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❷ 나는 누구에게 어느 정도의 긍휼을 베풉니까?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❶ 관련 설교 – 2020. 6.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긍휼’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긍휼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긍휼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긍휼보다 더 크고 포괄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긍휼은 ’문제‘를 전제하지만, 사랑은 문제가 없을 때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든지 ’긍휼‘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계속된 사랑의 관계로 인해 긍휼이 필요한 순간에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긍휼이 작동하는 것은 계속적인 하나님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❷ 관련 설교 – 2013 진짜 크리스천 산상수훈 8. 다른 기준 다른 삶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는 일, 친구를 사랑하는 일, 교회 안에서 믿음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일, 이런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46절, 4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 뒤에서 여러분 흉을 보고 다니는 사람, 여러분이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려고 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미움이 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원수를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된 사람 하나하나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도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입니다.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예수님을 고백함으로 일어나는 일, 세상을 당황하게 할 만한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❸ 관련 예화 – 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가족이나 교회가 당신을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든 상처를 주었든, 그전부터 당신은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받았다. 당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당신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자신이 선택받고 복 받은 자임을 마음으로 알면 우리는 남들 또한 선택받고 복 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들로 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다. 삶과 죽음의 여러 측면을 두루 직시할 때,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아뢸 수 있다.
사랑의 관점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합니다. 창녀, 세리, 죄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마음이 나에게도 있습니까?
❹ 관련 예화 –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후로는 오직 섬기려고만 할 것입니다. 심판자의 교만한 권좌가 그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는 미천하고 작은 자들 곁으로 내려가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신 곳이 바로 그 낮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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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며 자비입니다.
긍휼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부족한 마음이 애타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애통과 슬픔이며 구원을 갈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슬픔과 애통에 처해 있는 자를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며 상대방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가련하게 보이는 안타까움에 어여삐 여겨 사랑으로 보살펴 주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긍휼을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또한 행동으로 돌볼 때에 이웃사랑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애통하고 슬퍼할 때에 긍휼히 여겨 위로하고 돌봄으로 이웃을 사랑함에 남을 돌봄에 복이 있다 하시며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돌보고 구원을 하십니다.
조건을 따지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면, 참된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점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합니다.
죄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마음은 나에게도 긍휼히 여겨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로 항상 이웃 사랑하는 마음 실천하는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번도 결석은 하지 않지만 교회 의자에 착석하면서부터 끝나고 나갈 때까지 줄곧 휴대폰의 게임만 하는 탓에 교사로 고민이 깊었고 단톡방 초대해도 나가버리고 밤 9시에 보낸 카톡에 대해 매몰차게 '이 시간에 카톡 보내지 말라'는 덕에 마음이 안좋아서 쌤들께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교사로도 섬기지만 나무의 리더이기도 해서 지난 주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아이들 간식만 준비해서 부장님께 부탁드리고 MMP 교회에 열매들을 모시고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날도 게임만 하는 그 아이에게 앞반 남자쌤이 '딱 한 마디' 쌔하게 하셨다는데 그 이후로 예배를 잘 드렸다는 피드백을 듣고 감사하기도 했고 한편 다음 주에 안나올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맡은 순간부터 틈틈히 기도를 했지만 특히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는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긍휼함을 넘어 사랑이었던 순간입니다.
신기한 일은 오늘 예배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일 먼저 온 이 아이에게 인사를 했더니 잘 받아줍니다. 그래서 안부를 물었더니 대답도 하고 농담을 했더니 받아치기도 합니다.
찬양시간이 되니 휴대폰을 끄고 예배 끝날 때까지 안 만집니다.
단톡방에 다시 초대해도 되냐 물었더니 흔쾌히 수락해주고 거부하던 간식도 공손히 받아줍니다.
기분이 좋아 단톡방에 랜덤 선물을 쐈는데 이 아이에게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했습니다.
내 기준으로 교사가 맡은 아이들 놓고 MMP 교회에 가는 문제도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다른 방법을 막으셔서 비웠던 그 시간과 앞반쌤의 지적에 혹시 상처되었을까 노심초사하며 기도로 보냈던 한 주간의 시간에 그 아이를 만지시며 그 마음에 일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내가 평소같지 않은 긍휼함으로 사랑을 흘러보냈더니 나를 더 긍휼히 여기셔서 그 아이 통해 기쁨을 누리게 하심을 깨닫게 하시니 정말 큰 헤세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