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6절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6장 25절-34절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갈망하면 채워집니다.
갈망과 채움은 인과관계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그래서 주를 따르는 자는 ‘주리고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혹 주림과 갈증이 없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마 5:6, 《메시지》 성경).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시 34:8).
의를 갈망하면 의로 가득 채워집니다.
‘의’는 ‘윤리적인 의’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 둘 다를 가리킵니다. 의를 갈망한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기준과 뜻을 간절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지금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주리고 목마르다’에 쓰인 원어는 극심한 굶주림과 타는 목마름을 가리킵니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갈망하되 끊임없이 계속하여 간절히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는 주님의 뜻을 더욱 알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듣고자 귀 기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부를’ 것입니다.
배부름은 허기나 갈증을 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족스럽게 포식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에게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십니다(약 1:5). 해야 할 바와 가야 할 바를 온전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의를 갈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준비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신 뜻과 기준대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의를 구하며 의를 행하는 자, 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까?
❶ 나는 매 순간,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구합니까?
❷ 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래서 주를 따르는 자는 ‘주리고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❶ 관련 설교 – 2020.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되,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주림과 목마름의 자세가 아니고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망이 아니고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악마적인 세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가려는 의지가 쉽게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오래 전,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지나치는 것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TV프로그램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소주 한 병에 몇 잔이 나오는지 아시나요?”
사실 술을 먹는 사람들도 별로 생각 없이 마시다보니 숫자를 세어보지 않은 듯합니다. 정답은 정확하게 ‘7잔’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쩌다 보니 한 병에 7잔이 담긴 것이 아니라, 아주 전략적 차원에서 7잔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죠.
두 명이 술을 마시다 보면 3잔씩 마시고 한 잔이 남게 되니 결국 한 병을 더 시키게 됩니다.
세 사람이 마시다 보면 모두가 두 잔씩 마시고 난 후에, 세 잔째에는 두 사람의 잔이 모자라니 결국 한 병을 더 시키게 됩니다.
네 사람이 술을 마시다 보면 모두 한 잔씩 마시고, 두 잔째에 한 사람만 모자라게 되니 결국 또 한 병을 시키게 됩니다.
술을 파는 사람도 참 전략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가만히 우리 주변을 살펴보세요. 물건을 파는 사람들,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략’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옵니다. 열망은 목마름과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목마른 자가 자기 샘을 팝니다.
술을 많이 팔고자 하는 갈망이 이런 전략을 만들었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려는 갈망이 있어야 의로운 삶을 향한 전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갈망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의를 갈망한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기준과 뜻을 간절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❷ 관련 설교 – 2021 후반기 변화산 5.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헨리 블랙가비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할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입니다. 저의 신학교 교수이시던 게인스 도빈스 박사님은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항상 틀린 답만 나올 때 우리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선 답을 찾기 전에 과연 내가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일단 파악하면 나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초점은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인생에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에 근거합니다. 그분은 그분이 하고 계신 일에 당신이 말려들기를 열망하십니다. 그분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알면 그분이 당신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의를 갈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준비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신 뜻과 기준대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❸ 관련 예화 –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강연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자 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 전체에 중대한 요구를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단지 삶의 영적 영역에서만 그분의 자리를 마련한다면,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을 이해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그분에게서 얻을 때뿐이다.
❹ 관련 예화 –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베드로는 물결치는 바다에 내려오라는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걸음을 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모든 것에서 요구되는 것은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세상이 보장하는 그 어떤 안전보다 유효한 토대로 삼는 것뿐이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예수의 말씀과 복종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다. 이처럼 과격한 행위, 이처럼 율법을 무시하는 “광신”을 방지한답시고 이성은 이의를 제기했고, 양심, 책임, 경건, 심지어 율법과 성서의 원리까지도 예수의 말씀과 복종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은 이 모든 것을 돌파하고 복종을 유발했다. 예수의 부르심은 단순한 복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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