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4절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고린도후서 7장 9-11절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애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복입니다.
고통과 근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요! 더불어 내주하신 성령으로 애통할 수 있음이 복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싼 구조적인 악들과 죄를 보게 하시고, 민감히 반응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애통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 나의 슬픔을 위해 울던 자가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위해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애통)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심이 찾아올 때 기뻐합니다. 그 근심을 통해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 곧 ‘가난한 심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죄를 보게 되어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 전심으로 인정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애통해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를 ‘품에 안아 주십니다.’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애통의 응답은 ‘위로’입니다.
현실적이거나 효율적이거나 유용한 답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때로 고통과 근심보다 더 힘든 것이 고독과 외면입니다. 곁에서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내 눈물과 울부짖음에 담긴 상황과 의미 그대로를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입니다. 나를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늘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나는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까?
❶ 성령께서 탄식하며 깨닫게 하시는 죄가 있습니까?
❷ 가난한 심령으로 주께 나아가 안기고 있습니까?
애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복입니다.
❶ 관련 설교 – 2020 복된 삶을 살기로, 3. 애통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중
인생의 전성기를 하나님과 동행하던 다윗은 잠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충실한 신하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신하를 살해하는 무서운 죄를 지었지만 그의 삶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그의 죄를 지적했고, 강렬한 햇볕이 드는 것처럼 강렬하게 그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이 때 다윗의 애통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애통함은 하나님 앞에 죄가 드러나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죄를 돌아보며 애통해하였고, 애통함 가운데 믿음이 회복됨을 보여줍니다.
시편 51편 1절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편 51편 17절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고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를 짓고 애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의 유무보다 죄로 인하여 애통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며, 죄를 짓고 난 후 우리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만이 죄와
잘못에 대하여 애통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애통함은 지금 우리 신앙에 살아 있습니까?
곁에서 나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❷ 관련 설교 – 2020 복된 삶을 살기로, 3. 애통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다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함께 아파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제가 유학시절 병원에서 교육받던 기억을 이야기 합니다.
미국 생활 1년이 지나가던 때, 겁도 없이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목회를 배우게 된 것이죠. 가장 큰 문제는 위로하고 싶어도, 마음이 아파도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의 방법은 환자들의 상황에 맞게 미리 영어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해도, 막상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파 절규하는 환자들을 위해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국말로 기도를 하고, 때로는 손을 잡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고, 때로는 그들의 하소연을 그냥 들어줄 때도 있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말하는 영어도 못 알아듣던 때, 환자들의 웅얼거림과 탄식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으음, 으음, 예~~” 같은 추임새 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아주 강력한 경험이 있었죠. 애통하는 자를 위해 말로 기도하는 것보다, 같이 아파해 주는 것이 위로이고 능력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병원에서 사역하던 한국 목사가 미국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저 위로해 주던 것도 놀라운 능력이라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어떤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함께 슬퍼하실 뿐만 아니라,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하던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던 자리에서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시면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서 애통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애통할 때 우리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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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근심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수 있을 때 내주하는 성령으로 애통할 수 있음에 복이 됩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악들과 죄를 보게 하시여 애통함에 위로를 받습니다.
죄악을 보게 된 자신을 통해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 곧 가난한 심령이 되기 때문에 성령으로 죄를 보게 되어 경외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은혜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주께 나아가는 자를 품에 안아 주십니다. 즉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은 내 눈물과 울부짖음에 담긴 상황과 의미 그대로를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보게 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애통함에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위로해 주시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날, 정말 기적같이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말씀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많이 외로웠지? 내가 다 알아~네 노력, 수고 내가 다 알아...네 힘과 노력으로 남편 품으려고 더 애쓰지 마~이제 내가 한다. 딸아~"
그 날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든지 동네방네 소문냈습니다.
죄의 법과 생명의 법이 마음에서 싸울 때 말하던 사도바울의 곤고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 날의 따스함이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이고 매일 사탄이 스스로를 정죄하려는 참소로 공격하지만 묵상과 말씀듣기와 필사로 마음을 지키게 하시니 내 안에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다윗처럼 아빠 아버지께 세세한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자녀로 살기 원합니다.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기는 위로>
오늘 묵상의 제목이 ‘하나님이 위로하신다’입니다
어제 묵상집에선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마5:4)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메시지>성경은 ‘위로’를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88쪽)
‘위로=소중한 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니!
은혜로운 표현이야...생각했습니다
작년에 마침 교회 서점에서 메시지 성경책을 구입했습니다
집에 메시지 성경책이 있어서요
메시지 성경으로 마태복음 5장 4절의 말씀을 찾아봤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메시지 성경, 마5:4)
전체 말씀 구절을 찾아보니 무서운 말씀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는데..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껴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가장 소중한 분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해서인가 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가장 소중한 분을 느끼게 하시는 주님!
지금은 가까운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렸거나 죽은 적이 없어서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에요
진짜 어떤 느낌인지는 더 살아봐야 알 것 같아요
언젠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때가 온다면?
그때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겨야겠어요
다시 이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며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