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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생명으로

2월 23일 예배, 온전한 헌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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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2: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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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는 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은 제사 전에 미리 곱게 빻아 준비해야 했습니다(레 2:1). 그러므로 예배는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하면 공예배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예배 시간에 참석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둡니다. 그 때문에 부서지지 않은 일상의 덩어리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거룩’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 어디에서나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곱게 빻는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곡식을 곱게 빻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 정성이 필요합니다.

소제는 내 자아와 전 존재를 완전히 부수고 해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온데간데없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분골쇄신의 헌신과 충성만 남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들이 모인 공동체는 ‘찢기고 부어지는’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서로를 안아 줍니다. 이물감 없이 아름답게 섞이고 어우러집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과 헌신이 없는 이들의 공동체는 서로 섞이지 않고 자기 의만 드러내며, 서로 파괴하고 부수는 파멸로 귀결됩니다.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을 넣을 수 없었습니다(레 2:11).

꿀은 고대 사회에서 이방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쓰였습니다. 또한 겉에 발라 그럴듯하게 꾸미는 위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룩은 반죽을 발효시켜 본래보다 부풀게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겉만 그럴듯하게 꾸민 제물, 과장되고 변질된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소제에는 소금을 치게 되어 있었습니다(레 2:13).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자신은 완전히 녹아 사라지되, 이로써 무언가 계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소금은 또한 감칠맛이 나게 합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막 9:50). 헌신과 충성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헌신도 충성도 아닌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배와 봉사와 헌신에서 내 모습, 내 이름이 소금처럼 완전히 지워질 때, 참다운 예배, 참다운 헌신이 됩니다.


나는 온전히 헌신하는 예배자입니까?

❶ 나의 예배와 헌신에서 배제해야 할 꿀과 누룩은 무엇입니까?

❷ 내 모습, 내 이름, 내 자아가 완전히 녹아 사라졌습니까?


묵상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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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배에 참석할 때 ‘부서지지 않은 일상의 덩어리’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과 교회 어디에서나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곱게 빻는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❶ 관련설교 ➀ 2003 신실한 예배자 온전한 헌신으로 

구약시대의 제사 중에 “소제”라는 것이 있는데, 레위기 2장에 있는 “소제”란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가 시작되기 전 이미 가루 된 모습으로 드려져야 하는 예배를 뜻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모습이란, 하나님 앞에서 때로는 뻔뻔스럽게 너무나도 탐욕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온전히 죽어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살아있는 생생한 낱알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잘못된 예배자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소제”의 참다운 의미가 헌신임을 생각할 때, 곡식을 그냥 드리지 않고 “고운 가루”로 드리라는 말씀을 통해, 곡식이 갈아지는 완전한 부서짐과 완전한 변화, 즉 알갱이가 고운 가루로 변화됨을 통해서만이 헌신과 충성이 나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운 가루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제물로 드려지기 전에 완전하게 가루로 변해져야 합니다. 예배시간이 아니라, 예배로 나오기 전에 말입니다. 고운 가루로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나 큰 아픔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헌신의 삶을 예배시간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살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헌신된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절제되고, 내가 죽어지고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말입니다. 헌신된 삶을 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기의 삶이 포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제는 내 자아와 전 존재를 완전히 부수고 해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운 가루’들이 모인 공동체는 ‘찢기고 부어지는’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서로를 안아 줍니다. 하나님은 겉만 그럴듯하게 꾸민 제물, 과장되고 변질된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관련설교 ➁ 2003 신실한 예배자 온전한 헌신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던 공동체는 바로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아니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싸움을 하고 철저하게 부서진 모습으로, 그러나 승리한 기쁨을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의 공동체가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였습니다. 당시 황제를 숭배하고 있던 로마 제국에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곧 제국에 대한 배신이었고, 이 배신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예배란 이런 처절한 투쟁과 헌신의 삶을 살다가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죽음을 헤치고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영향력을 상실한 것은 예배는 드리지만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가루가 되도록 부서지지 않고, 덩어리째 사는 예배자들 때문입니다. 

 

꿀은 그럴듯하게 겉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는 순전한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반하는 것입니다. 제물에 누룩을 섞는다면, 실제보다 부풀리게 될 것입니다. 실제의 모양과는 다른 모습으로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발효시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결국엔 변질되게 만듭니다. 헌신과 충성의 예배란, ‘있는 모습 그대로’만 드려질 수 있는 예배입니다. 과장된 나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과장된 내가 드러날까 봐 그것을 숨기다가 더 큰 거짓으로 위장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자신은 완전히 녹아 사라지되, 이로써 무언가 계속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와 봉사와 헌신에서 내 모습, 내 이름이 소금처럼 완전히 지워질 때, 참다운 예배, 참다운 헌신이 됩니다. 

관련설교 ➂ 2003 신실한 예배자 온전한 헌신으로 

‘소금을 치라’는 말씀은 완전히 죽어져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는 영적 의미입니다. 오직 맛만 남아 있으라고, 소금은 자신의 형체가 남아 있는 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소금이 맛을 내지 않는다면 길가에 뿌려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은 허영 덩어리입니다. 헌신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헌신이 아닙니다. 충성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충성이 아닙니다. 소금은 완전히 녹아져서 없어져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란 온전하게 내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온전하게 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참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삶은 매순간 내가 죽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녹아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정받음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헌신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신은 온전히 드려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가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헌신이 아닙니다.  

 

관련예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김남준, 생명의말씀사, 10.05.10) 

“예배자에게 문제가 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예배드리기 전 일주일 동안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참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앞에서 먼저 나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와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격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영혼이 깨어지지 않고는 모든 제사와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 뒤에는 언제나 예배 정신에 부합하게 산 사람들의 삶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의 예배도 받으십니다. 바로 자신의 예배 행위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한 사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는 사람의 예배입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는 눈에 보이는 제물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예배를 드릴 때 진리로 말미암는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우리의 삶이 예배 정신에 합당한 삶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만한 예배자의 삶인가를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돌아볼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 기도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의 빛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관련예화 (『예화포커스47-헌신, 희생』 한태완, 좋은땅, 20.06.05) 

“주님을 위한 삶” 

어느 목사님이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부인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마음이 기쁘지 못합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아무 봉사도 못했어요. 제가 소녀시절에 주님께 작정하기를 꼭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많이 하겠다고 했는데, 저는 주님께 바친 봉사나 헌신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그 부인에게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하루 세끼의 음식준비와 설거지를 해야 했어요. 식구들의 빨래를 모두 해야 했고, 또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자매님은 아이들이 몇입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들이 넷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목사님 아시는 대로 큰 아이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둘째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중국에서 제 형을 도우며 일하고 있구요. 막내는 오늘 아침 나를 보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자기의 삶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부인이 하늘에 갖고 있는 그 큰집이 부럽고 성도님이 주님의 보좌에 아주 가까운 것처럼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행한 작은 일이 곧, 하나님의 귀중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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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온전한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곱게 빻는 거룩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자아와 전 존재를 완전히 부수고 해체하여 나는 온데간데없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분골쇄신의 헌신과 충성하고 순종하는 예배이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헌신과 충성의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헌신도 충성도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와 봉사와 헌신에서 내 모습 내 이름이 소금처럼 완전히 지워질 때 참다운 예배, 참다운 헌신 예배로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02.23
이명진
#2.
<방부제, 감칠맛 내는 역할을 하는 소금처럼>
출근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같이 식사한 선생님께서
“급식실이 계란찜 맛집이네! 계란찜 너무 맛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기도 갔다가요
교회에서 7시에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아침식사를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점심시간까지 버티며 일해서요
계란찜이 아니라 계란 모양의 돌도 맛있다고 할 기세였습니다

워낙 배가 고팠던 상태라 제 미각의 평가를 믿을 수 없지만요...
계란찜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계란은 뭐, 원래의 상태니까요
계란찜이 맛있을 수 있었던 공로의 90%는 소금이었습니다

소금간을 매우 잘했습니다
짜지도 않고 맹숭맹숭하지 않아서 맛있었습니다

소금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소제(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에도 소금의 역할이 중요했나 봅니다

하나님은 소제에도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2:13)
Season all your grain offerings with salt. Do not leave the salt of the covenant
of your God out of your grain offerings; add salt to all your offerings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라Season all your grain offerings with salt고 명하셨습니다

묵상집에서는 소금의 역할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방부제 역할, 감칠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자신은 완전히 녹아 사라지되
이로써 무언가 계속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소금은 또한 감칠맛이 나게 합니다(65쪽)

소금을 예배에 적용해 설명해줍니다

-예배와 봉사와 헌신에서 내 모습, 내 이름이 소금처럼 완전히 지워질 때
참다운 예배, 참다운 헌신이 됩니다(65쪽)

계란찜 속의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금은 완전히 녹았지만 계란찜이 버려지지 않고 존재하게 했습니다
감칠맛도 나게 했습니다

예배, 봉사, 헌신을 할 때 저의 자세가 소금과 같아야 함을 느낍니다

예배를 돕는 봉사를 할 때는?
제 이름이 지워줘도 예배가 돋보이고 예배가 잘 드려지도록
소금의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이름이 지워줘도 된다면서? 오늘 SNS에 새벽 기도에 대한 걸 올렸던데?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SNS에 변화산 새벽기도에 대한 걸 많이 올렸습니다
블로그, 인스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썼습니다

새벽기도를 알리고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SNS에 새벽기도를 쓰면? 새벽기도 다닌다면서 저러냐..라고
괜히 똑같은 잘못을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볼까 봐 조심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변화산 새벽기도가 제게는 너무나도 큰 천국 잔치입니다
욕 몇 마디 먹는다고 잠잠할 수 없습니다
마구 자랑하고 여기저기 떠벌렸습니다
내일도 나팔 불 예정입니다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왜 저래? 그냥 평범하게 남들과 똑같이 살지..
새벽기도까지 다녀? 유별나긴!’하며 문화 충격을 받아도요

나중에 저를 이해할 날이 올 겁니다

그들이 언젠가 하나님 앞에 가면?
‘아, 걔가 그때 왜 그렇게 유별나게 교회 다녔는지 알겠다’하겠지용?!

무조건 예배, 봉사를 할 때 소금처럼 사라지며
침묵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마음 자세가 소금과 같길 원합니다

예배를 돕고, 봉사를 할 때?
소금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옆 사람이 더 잘 되도록 돕고 섬기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
내 이름이 왜 드러나지 않아?라는 섭섭증이 스리슬쩍 생기려고 할 때
소금을 떠올리게 해주세요

자신은 사라지되 남의 존재를 돋보이게 해주는 방부제 역할,
감칠맛 내는 역할을 하는 소금을 떠올리며...
마음을 바르게 고쳐 먹게 해주세요
2023.02.23
이명진
#1.
<소제는 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
4일 전 나무 모임을 할 때였습니다

언니 한 분께서
“나는 공감만 해주는 건 싫어한다, 공감도 좋지만 해결책도 같이 줘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네? 공감이 해결책인데요... 저는 남이 공감해주면 끝! 해결을 받아서
다시 제 할 일 하러 가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리어 상대가 너무 해결책을 제시해주면 상처를 받습니다
나도 다 아는데, 모르는 거 아닌데.. 슬퍼지기도 합니다

공감이라는 주제 하나만 놓고도 서로 생각하는 게 달랐습니다

저는 MBTI에서 감성형(Feeling)인 듯하고요
언니는 이성형(Thinking)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주제를 갖고도 다양한 생각을 합니다
살아온 환경, 경험, 성장 과정, 흥미, 관심사에 따라
서로의 반응이 다릅니다

교회, 학교, 회사.. 모든 집단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오늘 묵상집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되는 방법을 설명해줍니다

-소제는 내 자아와 전 존재를 완전히 부수고 해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운 가루’들이 모인 공동체는 ‘찢기고 부어지는’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서로를 안아줍니다 이물감 없이 아름답게 섞이고 어우러집니다(65쪽)

소제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소제를 드릴 때! 제물로 고운 가루fine flour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레2:1)
When someone brings a grain offering to the LORD, his offering is
to be of fine flour. He is to pour oil on it, put incense on it

내 자아와 존재를 부순 ‘고운 가루’가 될 때
서로 다른 지체들과 잘 섞여 어울릴 수 있습니다

덩어리는 섞일 수 없지만 고운 가루는 잘 섞입니다

주님! 제가 혹시라도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 성장 배경이 다른 사람 등..

저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여긴다면?
내가 아직 고운 가루가 되려면 멀었구나...해야겠지요?!

의식적으로 ‘내 자아를 죽인 고운 가루가 되어 어울려야겠다’하며
서로 다른 지체들과도 힘써 섞이길 원합니다

성령님! 사람들과 섞이기에 앞서서...
고운 가루가 되어 먼저 하나님과 섞이게 도와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아를 부순 ‘고운 가루’로 있게 인도해주세요
202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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