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예배자는 관객이나 시청자가 아닙니다.
목회자와 찬양대, 임사 맡은 자들은 예배를 ‘돕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드리는 주체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당사자입니다. 예배에는 방관자가 없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레 1:2).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대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피, 곧 대속의 죽음으로 주께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잡습니다.
가져온 제물을 잡을 때 제물의 피가 튀고, 그 피 냄새가 진동합니다. 살아있는 동물의 꿈틀거림과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죽음을 오감으로 느끼게 됩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물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을 되새기며, 오늘도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감격합니다. 오늘 나의 예배에도 이러한 묵상과 회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드리는 자는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레 1:3).
흠 없는 제물은 값이 많이 나갔습니다. 흠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시간과 정성도 필요했습니다. 예배에는 철저한 준비와 희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의 마음을 아십니다. 어떤 마음인지, 어떤 제물을 준비했는지, 어떤 자세로 예배드리고 있는지 모든 시종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이 아닌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창 4:3-4; 히 11:4).
만일 가인이 땅의 소산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예배자의
영·혼·몸이 예배를 위해 철저히 준비되었는지를 보십니다.
나는 온전히 준비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❶ 예배를 위해 나의 영·혼·몸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❷ 예배를 통해 죽음과 소생의 기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배자는 관객이나 시청자가 아닙니다.
❶ 관련 설교 – 2010 Christian Basics, 1. 예배드릴 때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배 가운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우리의 체험을 예배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예배에 대하여 유진 피터슨은 [그 길을 걸으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경은 예배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사람이 “체험”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 어떻든지, 심지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있는지조차 상관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다. 체험은 그러한 예배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예언자로서 사명을 받았을 때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을 모두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스랍의 체험”을 하려고 그 곳에 갔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계시하셨고 순종을 요구하신다.
예배는 바로 그 계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순종하는 행위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물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것을 되새기며, 오늘도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감격합니다.
❷ 관련 설교 – 2013 주님은 나의 최고봉, 1. 최고의 예배
사람은 약한 것, 깨어진 것을 싫어하여 자기가 아닌 자기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하고 꾸미고자 합니다. 언제나 의인, 착한 사람, 똑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제단 위에 내려놓으면 우리의 어둡고 나약한 모습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복음의 빛 아래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동시에, 그러한 우리의 참모습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됩니다.
(다음 장에 계속)
하나님은 예배자의 영·혼·몸이 예배를 위해 철저히 준비되었는지를 보십니다.
❸ 관련 설교 – 2013 주님은 나의 최고봉, 1. 최고의 예배
우리나라 초대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어린 시절 일화입니다. 언더우드는 유년 시절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하고 한 번은 언더우드에게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드리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1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산 제물은 많은 액수의 헌금이나 도덕적인 삶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불완전함과 약함, 욕망 등 까지도 모두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고 이제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경험과 영·혼·몸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서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형되어가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산 제물로써 몸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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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를 드리기 위한 준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드리는 주체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당사자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소나 양의 수컷으로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우리 죄의 대속 때문입니다.
예배 자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제물을 통해 죄에 대하여 자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것을 되새기며 오늘도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배는 철저한 준비와 희생이 요구 됩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제물을 준비했는지 어떤 자세로 예배드리고 있는지 모든 시종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영. 혼. 몸이 예배를 위해 철저히 준비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피. 곧 대속의 죽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 준비하는 마음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죽은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예배가 되려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인간의 경배의 최상의 표현이다
영적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예배는 자기 책임 하에 드려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시 10시 예배는 오케스트라가 강단 앞쪽에 자리하고 매주 예배를 돕고 있었습니다.
겨우 간신히 주일 10시 예배에 발만 들여놓고 성수주일하며 하나님이 주실 은혜만 바라는 게 예배인 줄 착각하던 어리숙한 내 눈에 늘 들어오던 오케스트라 단원 학생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순서가 아닌 시간에 앉아 있는 자세, 가끔 졸기도 하는 모습이 지적하는 은사가 있는 내겐 눈에 가시였습니다.
마침 아들 친구 엄마가 같은 단원으로 봉사하고 계셨고 학교 일로 알게 된 휴대폰 문자로 그 학생에 대해 말하며 안쪽 자리로 바꾸면 안되냐는 둥 훈수까지 두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청소년부 교사를 하다보니 주일 10시 예배를 참석시키기 위해 틈만 나면 이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 불러 기도하고, 카톡으로나마 심방하고, 어머님들께 협조도 구하고, 작은 사탕 하나라도 포장하며, 주일 아침이지만 일찍 일어나 9시 전에 교회에 도착하여, 10시 12시 예배를 준비하는 나를 생각하니 그 학생의 그 헌신이 하나님 앞에 어땠을까 아찔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내가 뭘 얻기 위해 가서 관객처럼 앉아 인도자의 인도에 따르는 형식이 아닙니다.
자주 곧잘 착각합니다.
일주일 내내 어떤 제물을 어떻게 드릴까 고민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한 심령, 애통하는 마음으로 참석하여 나를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예배가 되도록 일주일을 준비하는 영,혼,육이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