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경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옛 사람’을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홀로 사는 사람이고, 새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God’s way)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내 삶의 목적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허망한 욕정의 길, 썩어 없어질 길은 결국 죽음의 길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300백 년을 동행했습니다. ‘므두셀라’란 ‘창 던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창을 들고 불침번을 서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죽으면 부족 전체가 죽는다는 의미에서 ‘그의 죽음 뒤에 ‘심판’이 온다‘로도 읽혔습니다. 에녹은 아들을 낳은 후 ’심판‘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고, 심판을 생각하니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심판과 죽음 앞에서 가장 진지하고 신중해지는 법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5:21-24).
동행은 일치입니다. 내 뜻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 가며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던 처음 모습을 회복해 갑니다. 참다운 나, 나의 제자리를 찾아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된 복, ‘원복’(Original Blessing)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합니다(엡4:13).
‘새 사람’을 입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과정이 중요합니다(엡 4:13, 24).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때, 의와 진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끝까지’ 생명의 길로 걸으려면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❶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예수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요 14:6)?
❷ 하나님과 일치하며, 닮아 가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까?
인간은 심판과 죽음 앞에서 가장 진지해지며 신중해지는 법입니다.
❶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사망 오보 기사 : 알프레드 노벨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호텔에 배달된 신문기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란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 이름을 잘못 기록한 오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계적인 발명가라는 명예와 엄청난 재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명예와 엄청난 재물이 죽음 앞에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인간 역사에 큰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인간을 마구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바로 그 기금으로 노벨상(Nobel Prize)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신문의 오보가, 노벨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라는 물음이 세계최고 권위의 상을 만들었습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던 처음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❷ 케이티 데이비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중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내가 알기로 그 중에 안전하게 살라는 명령은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안전한 삶으로 부르신 적이 없다. 대신, 위험한 순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손 안만큼 안전하고 좋은 곳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새 친구들과의 삶 속으로, 새로운 문화의 한복판으로 한참 들어간 뒤에야 하나님이 나를 둘러싼 패러독스들을 통해 내 시각을 바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내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은 뒤집어진 내 세상을 똑바로 세우고 계셨다. 미국에서는 100달러로 신발 한 켤레밖에 살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100달러면 굶주린 가족이 몇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바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소파에 쓰러져 청춘 드라마를 보며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간다에서는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서 예수님께 새로운 힘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는 지친 몸과 마음을 풀 데가 없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때, 의와 진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❸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중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을 핑계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떤 행위들도 허용하지 마십시오. 거룩은 당신의 발걸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고, 당신의 혀로 더러운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머리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사를 거치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는 늘 정당성의 원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잠깐 타협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타협이 목적이 되어 있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그 어떤 것을 떠난 것도 우리 삶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 자료(2013년) 설교 마무리 글
동행은 “능력을 받아”가는 길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길입니다.
동행의 끝에는 진리가 기다리고 있고, 그 길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동행은 결단입니다. 결단이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결단입니다.
이 세상에 주여주여 하는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동행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