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눅 18:23
한 줄 노트
-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 순종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우리의 생각에 대한 헌신과 주님께 대한 헌신은 완전히 다릅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의 삶에 ‘거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까?우리를 낙담하게 만드는 지점에서 찾아봅시다.
묵상 레시피
(호세아 8:1-6)
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3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누가복음 18:23)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떤 죄를 책망하십니까? (1,3,5절)
- 이스라엘의 첫 번째 착각은 무엇입니까? (2절)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착각은 무엇입니까? (4절)
- 그들의 생각과 행위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6절)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1절)
독수리나 매는 부정한 새들로 여겨졌다(레11:13). 이러한 새들이 성전 위에 앉거나 맴돌 경우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불을 피워 새를 내쫓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행해지는 각종 부정들을 깨닫도록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했다.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5절)
하나님은 구체적인 죄로 왕, 지도자, 우상(4-6절)에 관해 말씀하신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여로보암 왕이 죽은 후 30년 동안 왕이 여섯이나 바뀌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인 없이 왕과 지도자를 세웠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북 왕국의 여로보암 왕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다(왕상10:5-6, 12:28-29).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예배하러 다니다가 혹 남 왕국에 마음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송아지를 가리켜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이라고 속였으며 많은 백성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만든 것이며, ‘장인’이 만든 것이라고 책망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서 난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바이며, 결국은 산산조각으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4,6절).
1. 슬픔이 기쁨이다
어제 묵상을 기억하시나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떠나간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묵상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이전에도 접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청년이 나중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완전히 실망하고 주님을 떠난 청년의 이야기만 나와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찢어지는’ 과정이 헌신의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 원문의 제목은 ‘말 못할 슬픔을 경험해보셨습니까?’(Have you ever been expressionless with sorrow?)입니다. 말 못할 슬픔이 무엇일까요? 부자 청년에게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완전히 낙심한 채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도 오늘 부자 청년의 입장에서 동일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남들보다 부요하다고 느낀 부분들-성격, 개인적인 집착, 마음과 생각이 머무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임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삶에서 가장 집착하는 부분에 대하여 아주 직설적으로 물으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시지만 애걸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근심하고 낙담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그것을 버릴 수 있는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생각들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인생에 목표로 삼았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지 말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슬픔과 낙담이었습니다. 혹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그러한 슬픔과 낙담은 큰 기쁨입니다. 슬픔과 낙담을 경험한 자만이 가장 진솔하게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슬픔에 직면해 보지 않고 말하는 것들은 때로 너무 피상적이고 가벼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실망해도 괜찮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라는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에게 그 순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지를 드리느냐 마느냐의 내적 싸움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헌신’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 역시 전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한 헌신과 완전히 다른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자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당신은 주님보다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에 더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슬픔을 자아낼 주님의 거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주님의 거친 말을 부드럽게 만들려는 시도가 ‘타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거칠게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거친 말이란 요즘 말로 ‘뼈 때리는 말’이겠죠. 직설적으로 폐부를 찌르는 말씀의 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이 꼭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스스로 무기력하다는 생각 역시 교만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이유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면,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니 말입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부르심을 거절하는 사람이나, 궁핍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자신이 궁핍하다는 생각도, 대단하다는 생각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실망하는 이유는 이런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 채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실망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환상이 깨집니다. 힘든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순간에 자기의 헌신이 얼마나 가짜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주님께 헌신했다고 여겼던 것들이 결국 ‘자신의 헌신’을 사랑한 증거가 되니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네 모든 것을 팔아’와 같은 거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실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거친 말씀으로 인해 슬픔이 찾아왔다면 기뻐하십시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해도 괜찮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나도 게임과 도박중독에 빠진 두아들이 있습니다 주님 제 마음 만져주세요 두 아들을 볼때 많이 안타갑고 힘듭니다
두 아들을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