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벧후 1:4
한 줄 노트
- 스스로에게 집중하면 자기연민에 빠지지만, 하나님께 집중하면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진정한 부요함은 ‘흘러넘쳐’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지금 부요합니까, 빈곤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묵상 레시피
(빌립보서 4:10-2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2)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베드로후서 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 바울이 기뻐하는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10절)
- 바울이 기뻐하게 된 실제적인 사건은 무엇입니까? (10,14-16절)
- 바울이 기뻐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5-17절)
- 이에 대한 진정성이 잘 드러나는 바울의 생각을 살펴보십시오. (11-12,18절)
- 바울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습니까? (13,19절)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10절)
바울이 경험하는 기쁨의 독특성은 ‘그리스도’로 인함이다. 그 기쁨의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의 처지를 생각하고 지원하려는 이야기들을 재개한 연고다. 성도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바울을 지원하지 않았지만 바울은 섭섭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또한 재개되는 지원에 대한 기쁨,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려는 것도 아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경제적인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후8:1-4).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절)
바울은 궁핍하다(14절, 괴로움). 그러나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자족하는 것(헬, 아우타르케스)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자들이 <자유함>을 누리기 위해 습관화 했던 기본 태도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 자족을 배웠다. 바울은 지원과 도움을 요구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지만, 그것에 종속되어 선교에 방해를 받을까봐 복음을 위해 스스로 <자족>하기를 배웠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자족>하는 것이 바울의 의지와 결행이었다면 아무리 <복음>을 위한 동기일지라도 인간의 공로라고 봐야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마음의 시작과 결단, 실행, 능력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고백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선교적 의지를 불어넣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헬, 클레이안)>도 채우실 것이라고 믿는다. 바울의 목회적 태도와 빌립보 성도들의 선교적 태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기인한다.
1. 자기연민의 죄
오늘 묵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에 대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나누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먼저 길러야 할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요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 준비해 두셨음을 깨닫는 습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자기연민’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연민’(self-pity)이란 무엇일까요?
“자기연민보다 더 심각한 죄는 없습니다. 자기연민은 하나님 대신 자기 유익을 마음 보좌에 둡니다. 또한 우리의 입을 열어 불평을 쏟게 하고 우리 삶을 끝없는 영적 갈증에 빠지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랑스러운 모습도, 덕스러운 모습도 없습니다.”
‘자기연민’에 대하여 한 번 묵상해 보겠습니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늘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자기 유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할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이 팽배하지 않겠습니까? 삶에서 느끼는 갈증이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삶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짜증나고 비참합니까?
손성찬 목사님이 쓴 [일상의 유혹]에 보면 ‘자기연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장 옆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도 당장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게 우리다. 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더라도, 가끔 어떤 이들은 자신의 가시에만 집중하곤 한다. ‘자기연민’이랄까? 어떤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자존감이 끝없이 하락하는 시기와 상태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다. 자기 사연을 부풀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가시’는 어느새 ‘대못’으로 바뀐다. 누가 보면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힌 대못인 줄 알겠다. 자기감정도 부풀려진다. 십자가의 대못을 로마병정들이 일부러 내리친 것처럼, 누가 보면 누가 일부러 나 죽으라고 내리친 줄 알겠다.
‘자기연민’에 빠지면 하나님의 풍성함을 잃어버립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함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감사하며 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렸다면 풍성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할 때 누리는 풍요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풍성함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신’에게 집중하면 풍성함이 사라지고 자기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2. 부요함을 누리는 비결
삶에서 축복인지 고난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순간부터, 주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만족의 샘들이 주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속한 모든 헛된 부요를 궁핍하게 하십니다.”
이 묵상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부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를 궁핍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했던 부요함은 늘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채울수록 또 다른 욕망을 갈구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요함을 누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세상 것이 지나가면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은혜와 능력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부요함’은 세상과 환경에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 말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부요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 부요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은 나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필연적으로 그 부요함이 흘러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우리가 누리는 부요함이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능력이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0-13절 말씀.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Self pity에빠져나를향해시선이 머물지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