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의탁할 지어다
벧전 4:19
한 줄 노트
- 우리를 어디에 두시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고통’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 성도의 가치는 ‘유용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묵상질문
고통 중에도 선한 힘이 떠나지 않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쓰신다면 무엇도 방해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묵상 레시피
(디모데후서 1:11-12)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베드로전서 4:19)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무엇으로 보았습니까? (11절)
- 그로 인해 당연히 감수하기로 각오한 것은 무엇입니까? (12절)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12절)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12절)
바울이 각오하는 고난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반대와 핍박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갈6:12). 선포자와 사도, 교사의 사명은 고난과 순교를 전제로 한다.
내가 알고, 확신함이라(12절)
바울은 임명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세우심을 입었다(헬, 에테덴)’는 수동태로 쓰였다(11절). 하나님으로부터 임명 받았음을 늘 기억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바울은 그가 믿는 자를 ‘알았다(헬, 오이다).’ 이는 완전한 앎, 확신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또한 그는 ‘확신했다(헬, 페페이스마이).’ 이 동사에 쓰인 완료시제는 바울의 믿음이 확고함을 나타낸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구금된 상황, 그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다.
내가 의탁한 것을(12절)
‘나의 의탁한 것(헬, 텐 파라데켄 무)’에 쓰인 ‘파라데켄’은 보증금 혹은 다른 이에게 맡겨진 재산을 뜻한다. 이는 전문적 상업 용어로 여행 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소유물들을 신뢰할만한 자에게 맡기는 것과 관련된다. 맡은 자는 그것을 신실하게 보관하였다가 되돌려 주는 것을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의무로 여겼다. 바울은 하나님께 무엇을 의탁했는가? 첫째, 복음과 사도로서의 사역이다. 바울은 이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 이후에도 또 다른 이를 부르셔서 복음과 사명을 지키실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생명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긴다.
1. 고난을 대하는 태도
‘고난’은 성도들에게 늘 시험입니다. 고난을 피하면 왠지 신앙적이지 않은 것 같고, 고난을 선택하면 감당해야할 짐이 너무 무거우니까요. 챔버스는 오늘 묵상 첫 문장에서 아주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난을 의미하더라도(고난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선택한다면 이때는 매우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기준은 ‘고난의 유무’가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던 일관된 태도는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늘 기도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당하는 고난도 쉽지 않지만, 다른 성도들의 고난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또한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챔버스의 글이 인상적입니다.
“다른 성도가 고난의 훈련을 받을 때 참견해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다른 성도’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한 자녀를 막아서는 부모와 형제들을 종종 만납니다. 내가 가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더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로막거나 고난의 훈련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고난에 대하여 우리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고난’ 앞에서 취하는 태도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히 동정심으로 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동정심이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훈련의 시간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전 묵상 글에서도 챔버스는 ‘자기연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다루실 때 자기연민에 빠지면,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2. 성도의 가치
베드로전서는 특별히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한 권면의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4장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의탁할 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동정을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의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긍휼과 자비를 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흔히 “이곳에 내가 너무 필요해서 주께서 나를 여기에 두셨구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가치로 평가한다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낭비’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기준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곳에 성도들을 두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 선교사가 동료들과 함께 아우카 족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을 때, 미국 잡지 ‘TIME’은 “What a waste!”(웬 낭비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죽음을 두고 “영광의 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성도의 가치는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쓸모 있었는가로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곳에 성도들을 두실 뿐입니다. 우리는 그곳이 어디든지 맞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챔버스는 성도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향해 힘 있게 자라나며 성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프린츠-알브레히트-슈트라세 지하 감옥에서 보낸 소식이 [옥중서신–저항과 복종]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힘들 때 마다 교회들이 많이 부른 찬양의 가사이기도 합니다.
선한 권능에 감싸여
1. 선한 권능에 어린애같이 고요히 감싸여 보호와 위로를 받으니 놀라워라.
나 이 날들을 그대들과 함께 살려네. 새해를 그대들과 함께 맞이하려네.
2. 묵은해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 괴로운 날들의 무거운 짐이 우리를 누르려 하니,
오오,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베푸소서.
3. 당신께서 괴로운 잔, 쓴 잔, 철철 넘치는 고난의 잔을 건네시니,
당신의 선하시고 사랑스러운 손에서 떨지 않고 감사히 받아 마십니다.
4. 그러나 당신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쁨을 베푸시어
이 세상과 그 햇살을 보게 하신다면, 과거를 잊지 않고 우리의 일생을 온전히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5. 당신께서 우리의 어둠 속에 들여보내신 양초가 오늘 따스하게 환히 타오르게 하시고
되도록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아오니, 당신의 빛은 밤에 반짝입니다.
6. 고요가 우리 주위에 짙게 퍼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들려주소서. 보이지 않게 주위에 퍼지는
세상의 저 충만한 소리를, 당신의 모든 자녀가 부르는 힘찬 찬송 소리를.
7. 놀랍게도 선한 권능에 감싸여 보호를 받으니 우리는 다가올 일을 자신 있게 기다리노라.
하나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새날에도 확실히 함께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