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고전 1:17
한 줄 노트
-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람이 되면 다른 것을 높이려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실체를 알면 사소한 일로 하나님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묵상질문
혹시 우리가 지금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1:1-7, 16-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17)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1)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 바울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합니까? (1절)
- 바울의 삶과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1절)
- 복음은 누구에 관한 것입니까? (2-4절)
- 복음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2절)
- 복음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16-17절)
-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5절)
- 복음을 들은 자들은(우리) 누구입니까? (6-7절)
짧은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이름은 “세상의 모든 이름 중에 저희를 구원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제 마음에 새기어 제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능력을 주시고,
그 이름이 제 모든 관심의 중심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이 제 존재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언젠가 주님이 제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저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가소서.
헨리나우웬_주님의 이름(1932-1996, 가톨릭 신부) 「 사귐의 기도」 59
1. 진정한 부르심은 무엇인가?
오늘의 묵상은 챔버스가 경험했던 4년간의 영적 암흑기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 암흑기는 챔버스가 세상 속에서 방황하며 하나님을 떠나있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역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거룩함’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거룩함의 문제는 그에게 늘 부담이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거룩함을 위해 싸우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설명해주었고, 아마도 그로인해 챔버스가 해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을 선포하도록 의탁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탁 받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요 12: 32)”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지, 어떤 사역을 수행하거나 개인의 성화를 이루는데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매일 묵상을 통해 우리는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챔버스가 지금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증거 하는 고백은 두 가지 일을 대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를 베푸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세례를 베푸는 일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일은 ‘자신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의 일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챔버스가 고민했던 것은 복음을 전하기에 부족했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좀 더 거룩하고 완전하다면 좋을 텐데 어쩌면 좀 더 완벽한 사역자의 모습을 꿈꾸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성화가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과연 사명을 감당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이렇게 노력해서 거룩을 이루었다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구속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성취를 드러내지 않을까요?
2. 구속의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챔버스가 얻었던 해결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나’를 성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속하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어제의 묵상에서는 ‘거룩에 대한 염려’ 때문에 찾아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거룩해서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더러워지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할 수치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진정한 사명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함을 선포하는 것도, 자신이 거룩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이러한 행위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선포하는데 장애가 된다거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보다 우선 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제 묵상(1월 31일) 중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문장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구속의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의 선함에 둔다면, 시험이 올 때 그 믿음은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온 세상을 구속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구속은 이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체험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복음이요 ‘구속의 능력’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체험’이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챔버스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우리를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챔버스가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 해결을 위해 ‘체험’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얼마나 사랑이 부족하고, 용서하지 못하며, 죄에 쉽게 넘어지고, 작은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 가운데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청해보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우리의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을 조르고 있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바울의 인생 속에서 한 가지 열정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마음의 고통과 환멸과 환난을 환영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마저 그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복음을 향해 요동함이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한 자신의 문제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에 대하여 연약하고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 말씀은 이러한 사도바울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어떤 체험이나 기적을 구하며 자신에게 찾아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기꺼이 그런 고난조차도 감수하며 ‘예수의 흔적’을 전하기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