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 9:22
한 줄 노트
-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깨뜨리시고 빚으심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묵상질문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까?그렇다면 그 선택 앞에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았습니까?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1:1-3)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9:22)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절)
-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2절 상반절)
- 그들의 정체성은 어디로부터 옵니까?(2절 중/하반절)
- 바울은 어디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까? (3절)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1절)
바울은 자신에게 3가지 수식어를 붙인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에는 2가지 대비적인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부름 받음’과 ‘보냄 받음’이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사도로서 보냄을 받았다.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 받았으며 복음을 위해 보냄 받은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절)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신앙 공동체이다. ‘교회(헬,에클레시아)’는 사회적 특성을 지닌 지역 모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며 해석되는 공동체이다.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인 교회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다(고전6:11).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2절)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회심’의 구체적인 행위를 뜻한다(롬10:12-14). 즉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교회는 단순히 모이는 장소,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세계 각처의 모든 이들은 예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의 주님이 세계 모든 교회의 주님인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3절)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노력, 행위로부터 성취되지 않는다. 오직 선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평화(헬, 에이레네)’의 헬라어는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로 쓰였으나 그 뜻을 다 담지는 못한다. ‘샬롬’은 단지 정치, 사회적 평화, 인간의 내면적 평화 등 다소 지엽적인 범위라기보다 ‘인간 전존재가 하나님이 베푸신 종말론적인 구원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부서져야 할 생각들
오늘 묵상 역시 원문 제목이 훨씬 더 직설적으로 와 닿습니다. “The eternal crush of things”, “멈추지 않고 깨어져야 할 것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묵상의 첫 문장은 사역자들이 계속해서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챔버스가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 일꾼은 하찮은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오스왈드 챔버스 기독교의 진리]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은 봉사가 아니라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하찮은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다른 사람에 대한 네 관심에 나를 일치시키려 하지 말고 그를 향한 내 관심에 너를 일치시켜라,”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주의 보혈로 거룩한 자가 되었다면, 주께서 보내시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묵상을 통해 우리가 지녀야 할 ‘하나님의 관점’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면, 오늘은 우리가 부숴야 하는 ‘인간적 생각’에 대해 묵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명이 주어지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할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특별해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이든,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갈 때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굽히시고 깨뜨리시고 빚으십니다. 왜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챔버스가 끊임없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굽히시고 깨뜨리시고 빚으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의식이 절대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우리는 그 선택에 항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분명한데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그대로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기어이 사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에서 깨어지는 아픔과 짓이겨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택하심 가운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픔이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스림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영원히 깨어져야 할 것이 있음을 늘 기억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2015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써 놓았던 저의 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올해로 제가 만나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만 1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때는 교인들을 설득해서 끌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때에는 저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여 년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제가 목회를 가장 편안하게 잘할 수 있었던 때는, 제가 가진 것으로 교인들을 설득하려 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늘, 제가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저를 이해하려는 교인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회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힘으로 증명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힘을 쓰지 않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위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과 피 흘림을 통해 그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교만과 우월성, 비교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지혜와 표적을 구함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세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