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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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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창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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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묻지 않아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묵상질문

성령님께 민감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아니면 자신의 확신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 8:9-14 + 창세기 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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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9-14)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창세기 24:27)
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9절)
  • 우리는 육신과 몸의 행실에서 어떻게 자유 할 수 있습니까? (10-13절)
  •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14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
성령 내주는 육에 속한 자들과 성도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표이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다(고전12:3). 성경은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처(고전 3:16)임을 강조한다. 성도는 육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어 성령과 밀접하게 교제하며 교통한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전 2:10,16:13, 갈5:22-23, 눅24:49, 행1:8).

몸은, 죽은 것이나, 영은, 살아 있는 것이니라(10절)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죄 지은 자는 모두 죽는다(창2:17, 3:19, 5:5, 롬6:23). 성도들 역시 이 생물학적 원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는 죽음 이후의 약속이 있다(요3:16). 10절 후반의 ‘살아 있는 것(헬, 조에)’은 ‘생명’을 뜻하는 명사이다. 직역하면 ‘영은 – ‘생명’이다’로 읽힌다. 성도들의 영이 살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지탱해 주시는 ‘생명’ 때문이다.’ 이 약속의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다(11절).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성도들도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생명과 활력을 주는 영’으로서 성도들의 삶에 생기를 주실 뿐 아니라(6:11), 마지막 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이다(살전4:14, 갈6:8, 빌3:10, 고전6:14,15:52-53, 고후4:14).

우리가 빚진 자로되(12절)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빚을 대속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사랑에 빚진 자이다. 죄에 빚진 자는 ‘육신의 소욕’이 채근 하는 대로 살았지만(13절) 이제 그럴 이유가 없다. 이제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는 영이 이끄시는 삶의 양태대로 살아간다. 자유와 해방, 구원의 기쁨을 누린다.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누린다(14절).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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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님께 민감하기

11월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남은 60여 편의 묵상이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며칠 동안 나누었던 ‘고난’, ‘계획’, ‘거듭남’과 같은 주제들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둔 문제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인생에서 고백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며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게 하나가 되면 주님께 나를 어떻게 인도해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챔버스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종종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챔버스는 이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굳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순종의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할지 하나하나 묻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할 때, 성령께서 민감하게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의 일 사이에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죠. 챔버스는 이러한 갈등을 ‘성령의 경고’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사용하는 ‘경고’(monition)라는 단어는 ‘충고’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충고는 귀를 막은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경고는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매순간마다 무엇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이 성령님께 민감한 상태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주님께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인도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경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에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서 하나님께 기념비를 세우며 했던 고백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고백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분이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지난 날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일상의 훈련

성령님께 민감한 삶은 한 번의 영적체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챔버스의 묵상 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영적 훈련’입니다. ‘민감함’ 역시 훈련을 통해 점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산 정상으로 인도하셨다가도 세상의 골짜기로 데려오십니다. 변화산에서 들었던 음성을 세상 한가운데서도 들어야 합니다. 아무런 방해가 없던 변화산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렸지만,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에 민감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저에게 참 흥미로운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늘 ‘목사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 아내와 함께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갔는데 뒤에서 누가 ‘목사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저와 같이 뒤를 돌아본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 학원을 다니던 시절입니다. 저보다 어린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던 교실에서 누군가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그 아저씨가 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일상의 영적 훈련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성령님께 익숙해져야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익숙해지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님께 익숙해지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이 부분도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은 일관성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셨습니다. 성도의 단 한 가지 일관성은 원칙이 아니라 신령한 생명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바를 맹신하는 ‘광신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자신의 믿는 바를 확신하고 자랑하며 사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확신범’입니다. 자신의 확신이 얼마나 빗나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성령께 민감하기 위한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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