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8
한 줄 노트
- 믿음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원한다면 세상과 한 걸음 더 멀어져야 합니다.
- 진정한 성화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할 걸음 한 걸음 믿음의 여정을 가며 만들어집니다.
묵상질문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단 한걸음을 내딛는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20:20-28)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히브리서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20-21절)
- 그 여인이 구한 것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25절)
- 예수님은 여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2-23절)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셔야 할 잔은 무엇입니까? (26-28절)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20절)
관습 상 본인보다 어머니의 요청이 더 호소력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막10:35-45에는 어머니 대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직접 요청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인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가 나선 것은 어머니나 아들들이나 예수를 따른 것에 대한 보상, 영광, 높은 자리에 대한 야망이 크고 그만큼 간절했음을 드러낸다.
절하며 구하니(20절)
초대 교인들은 예배 때 절하며 기도했다.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절하며 <무엇을> 구한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22절)
야고보와 요한, 어머니는 예수님이 지상의 왕국을 세울 것을 기대했다.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을 요청했고, 제자들 역시 그 의미를 알아듣고 분개했다. 예수는 ‘잔(헬, 포테리온)’을 언급한다. 유대교 문헌에서 하나님이 섞어 마시게 하시는 잔은 ‘순교’를 의미한다(26:39, 계14:10,16:19,18:6 참고). 제자들은 축배를 떠올렸으나 예수님은 ‘죽음의 잔’을 말씀하신다.
섬기는 자… 종(27절) (헬, 디아코노스, 둘로스)
이방인, 세상 나라의 방식과(25절)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전혀 다르다(27절).
1. 세상과의 분리
오늘 묵상 본문은 1월 2일에 나누었던 말씀과 동일합니다. 앞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오늘은 ‘분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직업과 돈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분리’를 택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우선으로 할 때,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바로 ‘분리’입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를 위해 아브라함도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분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위치적 분리가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면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분리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우리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을 경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자리에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이렇게 정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종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그런데,
“믿음의 삶에서 큰 장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창세기]에서도 동일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묵상에서도 인용한 글입니다. “영적인 삶에서는 좋은 자리에서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고 더 나은 자리에서 최선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대상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은 바로 최선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믿음의 삶이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인데, 우리는 세상의 성공을 지렛대 삼아 점점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점점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갈수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믿음의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이런 신앙의 오류 즉, 성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분리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2. 믿음이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줬던 믿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는 어떤 믿음일까요? 챔버스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지속적인 동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죠. 믿음의 완성은 우리가 원하는 성공이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의 완성입니다.
‘축복’이라는 결과로 믿음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때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을 하나 생각해 볼까요?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가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채가 나는 몸으로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너무 놀라 감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초막을 짓고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았던 영광은 더 이상 산 아래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믿음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상으로 데리고 오셨고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제자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날개를 펼쳐 저 높은 곳에 단숨에 날아오르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걸음씩 계속 걸으며 나아가지만 지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영광스러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 증명되고 마침내 그 시험을 이기고 일어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이란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이 성화되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성화의 삶’이 아니라 ‘믿음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성화의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로마서 4장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