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
살전 3:2
한 줄 노트
- 나는 나의 길을 알지 못하지만, 그분이 선하게 인도하심을 믿기에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묵상질문
내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나의 능력이 아닌 그분의 능력이 나를 붙잡아 주심을 믿습니까?인생의 최선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믿습니까?
묵상 레시피
(이사야 43:14-21)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3:2)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15절)
-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것입니까? (16-17, 19-20절)
-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십니까? (18절)
- 하나님은 왜 이 일을 하십니까? (20-21절)
구속자, 거룩한 이, 창조자, 왕(14-15절)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다. 이사야는 새로운 출애굽(16-17절)을 이루실 구속자 하나님, 새로운 창조(19-20절)를 이루실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며 일깨운다. 이스라엘은 다시금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실(히, 솰라흐)’ 것이다. 이 단어는 ‘권위자가 특별한 사명을 위임하여 누군가를 파송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을 꺾을 군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세계 전체에 미치며,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 전체에 미친다(17절).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이전에 겪은 고통, 포로 생활의 아픔을 기억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이므로 모두 잊으라. 2) 이전의 출애굽, 창조의 일을 기억하지 말라.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의 구원, 더욱 위대하고 엄청난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두 해석 모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기필코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19절)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끄시려 홍해 가운데 길을 내셨던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목, 광야에 길을 내실 것이다. 이는 없는 길을 내서라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사막에 강을’이란 표현은 그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 역시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백성, 내가 택한 자(20절)
왜 이 일을 하시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기 때문이다. ‘택한(히, 빠히리)’은 ‘예리하고 자세히 살펴’ 많은 것 중에 신중히, 특별히 생각하고 선택한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위해 사막 가운데 강을 내신다. 그 곁에서 덕을 보는 들짐승도 하나님께 존경을 표할 것이다. 하물며 이 수혜의 당사자인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것,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21절).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되는 삶
이제 50여 일 정도의 여정이 지나면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이 끝납니다. 오늘 원문의 제목 “복음 안에서의 교제”(Fellowship in the gospel)처럼 앞으로 남은 묵상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거듭난 크리스천이 되어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주님의 목표’를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당신의 목적이 아닌 주님의 목적을 위해 당신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은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바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구원 계획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계획이 일치되는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우리는 자신의 계획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러한 일로 부르셨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장애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을 잘 생각하며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명’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께서 나를 이러한 일로 부르셨다’고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소명자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일을 도리어 방해할 수 있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의 목적은 ‘나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도록,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우정, 즉 ‘관심의 일치’가 시작됩니다. 챔버스의 말을 곱씹어 보십시오.
“이후로 당신의 행로는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당신은 당신의 가는 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11월 묵상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 삶을 전적으로 양도하는 것은, 그분을 믿기 때문이지 우리가 이해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고통 가운데서는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라는 구절이죠. 내가 나의 길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의 길을 아시기 때문에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난처럼 보이지만 “순금 같이” 만드시는 그분의 손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9-20절을 보세요.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어떻게 우리의 생각으로 광야에 길을 보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능력으로 사막에 강물을 내겠습니까? 하나님과 일치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기대되는 것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일이 언제나 나의 계획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믿으니, 기꺼이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 양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명확하게 정리가 됩니다.
“삶의 목표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위대한 계획이 있으며 그분은 그 입장에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모든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서, 이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뢰며 하나님을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선을 이루신다는 확실한 믿음입니다. ‘그분이 하십니다. 그분이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악도 선용하신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수없이 ‘자기 연민’이 사탄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연민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자신을 향할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힘을 씁니다. ‘나의 세상’ 속에 갇혀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합니다. 나의 세상은 여전히 두려움과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연약한 자의 체념이 아니라 가장 강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믿음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님께 양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