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6
한 줄 노트
- 부르심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 역시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부르심에는 순종만이 답입니다.
-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삶에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분명한 사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묵상 레시피
(로마서 8:26-30)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16)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 부름 받았으나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사람입니까? (26절)
- 연약한 우리를 성령은 어떻게 돌보며 인도하십니까? (26-27절)
- 뜻대로 부르심 입은 자들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입니까? (28절)
-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 목적’은 무엇입니까? (29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26절)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이미 구원을 맛보고 있다. 하나님께 부름 받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며 탄식하는 중에 있다(18절).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성도들은 난해함과 모호함에 직면한다. 연약한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할지,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한다. 성령님은 이러한 성도들을 도우시며, 위하여 간구하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27절)
성령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다. ‘살피다(헬, 에라우나오)’는 ‘찾아내다, 조사하다, 수색하다’라는 의미와 짐승을 추적할 때 ‘냄새를 맡다’, ‘바짝 쫓다’는 의미가 있다. 또는 횃불을 들고 물건이 꽉 찬 크고 어두운 방을 돌아다니며 특정한 무언가를 찾는다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은 복잡하고 난해한 우리의 존재와 삶을 속속들이 아신다. 필요한 것, 간구할 것을 정확히 찾아내신다. 성령님은 이렇듯 세밀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돕고 간구하시며 인도하신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이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주어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으로 모든 것이 선한 목표를 향해 집중되어 가도록 이끄신다. 세상적 관점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 목표를 향해 조정되어 감을 뜻한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어 ‘선’을 향하게 하신다.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29절)
우리가 향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맏아들’로서, 우리의 ‘맏형’으로서 따라야 할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비롭게 부르셨으며, 우리 안에 복음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일으키신다. 예수님을 필두로 한 형제, 자매가 된 성도들은 ‘의롭다 여김 받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들어가며 동참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원형과 원복을 누리며 ‘영화롭게’ 된다(30절). ‘그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다(살전2:12)’.
1. 부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늘과 내일의 묵상은 ‘부르심’을 주제로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 내일은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로 삼으시기 위함임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손길은 초자연적입니다. ‘초자연적’이란,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판단을 초월하는 부르심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르심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부르심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챔버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 가운데서 주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은 갑작스러운 천둥 번개나 점차적으로 밝아지는 새벽빛같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오든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뭔가 초자연적인 흐름과 함께 오며 아주 분명한 희열이 동반됩니다.”
부르심의 이러한 특징은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에 자주 등장하는 요한복음 15장 16절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구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부르심이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전, 그 신비로운 빛과 북소리]라는 책에서 부르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없다. 부르심에 대한 유일한 확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진다. 오직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는 성령만이 부르심을 확증해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예들을 발견한다.
챔버스는 계속 ‘부르심’과 ‘구원 혹은 성화’가 서로 다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사명입니다.
2. 부득불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죠. 고린도전서 9장 16절
“…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강권적으로 이끌어 가시거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우리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부득불’이라는 말이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후에,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알았습니다. 택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에서 버림받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었던 것이지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합당하게 쓰임 받는 것이요, 가장 큰 형벌은 쓰임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에게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는 의미 있는 삶을 향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은 ‘부득불’ 할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 개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역경이 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역을 위한 모든 수고는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자유의지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수도 있고 부르심을 외면해 버림받는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 뒤를 따라오너라! 이것이 전부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 그것은 아예 내용이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실현이 중요해 보이는 인생 계획도 아니고, 추구해야 할 목표나 이상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걸거나 자기 자신을 걸어야 할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대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부름 받은 자는 특별히 값진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부르심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뒤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복종 자체는 최소한의 가치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것 자체는 완전히 무의미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머문다. …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만 매이는 것, 부르시는 분의 은혜를 통해 모든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부르심은 은혜로운 부르심이자 은혜로운 명령이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적대 관계를 초월하는 부르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는 뒤를 따른다. 그것은 은혜와 명령이 하나가 된 부르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