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 8:36
한 줄 노트
-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묵상질문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매일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묵상 레시피
(열왕기상 19:3-8)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요한복음 8:36)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이세벨의 위협으로 엘리야는 어떤 선택을 합니까? (3절)
- 엘리야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4절)
-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무엇을 보내십니까? (5-7절)
- 엘리야는 그 일로 어떤 힘을 얻습니까? (8절)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도망하여(3절)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보았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떠났다’이다. 히브리어 접속사 ‘와우’가 3차례나 연속하여 쓰인 것은 엘리야가 주저하지 않고 즉시 피신했음을 나타낸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큰 승리를 경험한 후(왕상 18장) 이스라엘 전체에 회개 혹은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를 기다린 것은 죽음의 위협이었다. 엘리야는 직전에 큰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눈앞의 상황이 예상 밖으로 돌아가자 곧 위축되고 절망한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가서(4절)
엘리야는 이에 사환을 데리고 브엘세바로 간다. 이곳은 이스라엘 남방 경계로 블레셋과 마주하는 국경 지역이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을 떠나 사역을 포기할 작정이었다. 그는 사환을 남겨두고 광야로 하룻길 쯤 더 간다. 사역을 포기할 뿐 아니라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낙담하고 절망한 엘리야의 상태를 드러낸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4절)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사역이 ‘넉넉하다(히, 라브, 충분하다)’고 말한다. 할 만큼 했다는 의미와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탄식이 동시에 담긴 것이다. 그는 자신이 조상들보다 ‘낫지(히, 토브)’ 못하다고 말한다. 이제 고인이 된 조상들처럼 죽을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엘리야는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비관하고 있다. 그는 천사의 어루만짐과 공급함에도 다시 누울 만큼(6절) 지쳐있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7절)
하나님은 긴 말을 하지 않으신다. 다만 짧은 문장 안에는 엘리야가 가야 할 곳이 있으며 더 감당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자는 2번, 엘리야에게 음식물을 공급한다.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힘만으로 40일 광야 길을 지나 호렙에 이르게 된다.
개별성과 인격성
오늘 묵상에서는 두 가지 단어의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별성’으로 번역되는 ‘individuality’와 ‘인격성’으로 번역되는 ‘personality’입니다. 개별성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성령님의 인격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인격성’이란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새로운 본성을 의미합니다. 첫 문장에서 이 둘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교만이 남아 있으면, 그 교만은 언제나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한편 인격적 본성은 절대로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계속 뭐든 흡수합니다.”
이러한 본성과 ‘자유’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 보면 참 자유를 얻는 방법은 우리 인간의 개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죄와 개별성은 이렇게 무한한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락한 본성과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로움과 능력은 ‘순종’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어제 묵상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될 때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개별성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입니다. 즉,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려 희생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그 삶이 순종에 의해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 안에서 우리의 개별성이 완전히 죽습니다. 본성이 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순종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서 어떻게 죄 된 본성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더 이상 제한적인 인간의 개별성이 우리를 얽매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연적 개별성은 다 부서지고 인격적 본성이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과 연합하면 ‘나는 할 수 없어요’라는 말로 주님께 대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돕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삶과 관련해 우리를 훈련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론과 생각을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영적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우리 몫이라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인도하지 않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이론을 한번에 고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복종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결단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장’으로 불립니다. 사도 바울은 매일 죽는 삶을 통해 진정한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챔버스가 말하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유함’의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한 A. W. 토저가 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의 내용입니다.
암세포는 인체의 세포 중 가장 자유로운 세포이지만, 계속 성장하면 유기체를 죽일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제한된 자유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각 구성원은 전체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축소해야 하는데, 이 법은 온 피조세계에 적용되며, 하나님의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많은 자유의 위험성이 그리스도인을 늘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롭지만, 그의 자유 때문에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 사실 그는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고, 용서받은 악한 행위들의 도덕적 결과들에서 자유롭고, 하나님의 불쾌하게 여기심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다. 은혜가 그가 갇혀 있는 감옥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제 그는 그 옛날의 바라바(요 18:40)처럼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른 분’이 그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주어진 자유를 육신의 정욕을 위해 악용하는 것이다(신약성경은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하나는 낙타처럼 무릎을 굽혀 자발적으로 짐을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동료 인간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는 것이다.
꼭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자유는 우리의 능력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온전히 주님과 하나 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