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한 줄 노트
- 구속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성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묵상질문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당신에게는 ‘나도 베들레헴이 되었다’라고 고백할 믿음과 간증이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1:35)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이사야 7:14)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어떤 순서로 일하셨습니까? (35절 상반절)
- 그러므로 나시는 예수님은 무엇이라 일컫습니까? (35절 하반절)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35절)
예수님은 육체적인 방법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 세상에 나셨다. 먼저는 성령이 임하신다. ‘임하다’라는 표현은 중요한 ‘잉태’에 2번 사용되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이 잉태되셨고, 성령이 ‘임하여’ 초대교회가 잉태되었다(행1:8).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35절)
‘덮으신다’는 복음서 중 변화산 사건에서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에 쓰였다(눅9:34). 또한 구약에서 구름이 성막을 ‘덮을’ 때 사용되었다(출40:34-48). 이는 하나님 능력의 강력한 현존을 나타낸다. ‘성령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은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동일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의 태에 생명을 잉태하게 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심
오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우리는 ‘강림’(advent)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나오신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강림이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주제로 아주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을 해왔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이실까요? 아니면 하나님이실까요? 올바른 신학적 교리를 말한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 갇혀계신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초월적인 일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기독론’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지만 역사 속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고 기념한다고 하면, 과연 그분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역사 속에 오신 주님이 우리와 관계를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전에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당신은 개인적인 인생을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베들레헴’이 되게 한 적이 있습니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나신 곳이 바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이 된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방법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주님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육신적인 방법을 생각하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즉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거듭남의 특징은 내가 나 자신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형성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속성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꽤 어려운 말들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조성된다’, ‘내 안에 형성된다’, 또 ‘그리스도의 속성이 나를 통해 역사한다’와 같은 개념들입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동안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챔버스의 말을 통해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의 속성이 무엇인가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성’, 즉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니 우리를 통해 구속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듭났다고 우겨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질과 욕망으로 하나님께 양도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다면 아직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우리가 어떤 ‘완전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내 안에 내적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들과 씨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창 시절 다니던 교회에 성가대를 지휘하던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예민함이 조금 지나쳤던 분이죠. 연습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도 내고, 주변에 있는 것도 집어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인상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휘자는 은혜를 받았지만 성가대원들도 전부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 늘 일어났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예전 같았으면 화를 냈어야하는 순간에 그 지휘자가 밖으로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 마당 화단에 있는 큰 돌을 집어던지고는 다시 들어와 성가 연습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참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이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바꿔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지 그 속에서 원하지 않는 본성과 맞서 싸울 용기가 생겼다는 의미임을 알았습니다.
챔버스는 이 구속의 사건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