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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주님보다 체험을 더 좋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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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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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체험’은 우리의 구속을 표현하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지금 자신의 믿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9:13-34 + 고린도전서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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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13-34)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고린도전서 2:12)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이 고쳐주신 맹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20절)
  • 바리새인들이 맹인과 그 부모에게 한 질문과 의도는 무엇입니까? (14-24,34절)
  • 그 부모가 한 대답과 그렇게 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1-22)
  • 맹인은 그들의 질문에 어떤 답을 했습니까? (17,25-33절)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14절)
바리새인들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율법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긴 자로 ‘죄인’이다(16,24절).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과 구원, 그 의미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세한 율법 조항으로 예수님뿐 아니라 구원받은 맹인, 그 부모를 평가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그들의 기본자세는 판단과 분별, 정죄이다(34절). 율법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어느덧 자기 소신이 되어 믿음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구원마저 판단과 공격으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선지자니이다(17절)
맹인에게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한 자, 구원자이다. 그는 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자, 회복의 소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20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보게 된 것이다.’ 맹인은 자신이 경험한 객관적인 구원의 사실을 정확히 선포한다(25절). 예수님은 맹인을 ‘구원’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출교’하려 한다. 회당에서의 출교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측면 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서의 타격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맹인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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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험의 근원

오늘 묵상에서도 평소 챔버스가 말씀을 풀어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두 개의 단어 ‘구속의 체험’과 ‘구속의 실체’를 비교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챔버스가 늘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체험이 신앙과 믿음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실체는 구속 자체이지 구속으로 인한 신앙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속을 나의 의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때까지는, 나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체험이란 실체는 아니지만,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표현하게 만들어 줍니다.

문제는 자신의 체험에 사로잡혀 실체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속의 체험이 부정적인 의미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신앙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구별합니다.

“구속에 의해 발생된 체험의 증거는 언제나 ‘나’라는 존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을 더 이상 실체의 근원으로 오해하지 않고 오직 그 체험들을 발생시킨 진정한 실체에 관심을 모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구속의 체험을 했다면, 체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구속을 경험하는 순간 예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이전 묵상에서도 불렀던 화니 크로스비의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288장)”라는 찬양의 의미가 잘 이해됩니다.

“(1절)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 (3절)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 찬양의 가사 속에 오늘 챔버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체험을 하고 간증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체험이 자기 자랑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종 사용하는 표현처럼, ‘간증병’에 걸린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속의 체험을 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사역하던 사람이 그 사역을 간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구속한 주님께서 자취를 감추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체험이 주인이시고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2. 당신이 믿는 것은?

체험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의 믿음을 체험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그 체험을 ‘주관적인 체험’으로 가두면, 우리의 테두리 안에 성령님을 가두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셨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체험 속에 가두는 순간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체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동일한 체험을 구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과 같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았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체험을 주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챔버스는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체험의 주가 되십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체험을 예수님보다 앞세웁니까?”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지금 당신은 당신의 체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체험을 주신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체험보다 훨씬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것 이외에 다른 체험도 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양으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자라게 되면 자신의 체험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뭘 체험했는지보다, 그 체험을 주신 주님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오류를 범합니다. 기도하며 병을 고쳐주셨던 체험을 붙들고 살아가다가 또 다른 질병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위기 속에서 구해주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다가 또 다른 위험이 찾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체험을 의지하는 신앙은 계속해서 또 다른 체험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끊임없이 불평했던 이유는 기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져야 믿음이 응답받았다고 생각하니, 불편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들은 불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기적과 체험은 늘 불완전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깊은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체험’을 말하며 주님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체험을 주신 그 주님을 붙잡고 증거하고 있는가? 오늘 챔버스가 말하는 마지막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믿음 자체를 확신하는 믿음은 이미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만이 유일한 참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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