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한 줄 노트
- 의식적인 회개 없이 의식적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에게는 의식적인 회개의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청교도들의 기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구하십시오!
묵상 레시피
(느헤미야 1:2-11)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고린도후서 7:10)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느헤미야는 어떤 소식을 듣습니까? (2-3절)
-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4절)
- 그가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뉘우친 것은 무엇입니까? (6-7절)
- 그가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8-10절)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3절)
하나니는 유다로부터 수산 궁에까지 소식을 전하러 왔다. 2개월 이상의 여정을 감행한 것은 유다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환난과 능욕 가운데 있었다. ‘환난(히, 뻬라아)’은 수동과 능동 둘 다로 해석되는데 수동일 경우 ‘불행, 재난, 재앙’을 의미하고 능동의 경우 ‘사악, 악’을 의미한다. 즉, 귀환민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불행과 능욕, 환란이지만 한편 죄로 인한 측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루살렘 재건을 위한 성전건축, 성곽 공사는 모두 중단된 상태였다(에스라4:7-24).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여(4절)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1:5-7, 2:4,4:4-5, 5:19, 6:14, 13:14,22,29,31).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5절),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하며 중보하고(6-7),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해서 구원해 줄 것과(8-10절), 자신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해 줄 것에 대한 응답을 간구하고 있다(11절).’ 느헤미야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에 근거하여 울며, 금식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다. 느헤미야는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과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했다(11절).
회개는 구원의 시작
오늘 묵상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으로 묵상을 시작합니다.
“죄의 책망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 희귀한 일들 중 하나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관문입니다.”
이 말은 웨슬리가 ‘회개’에 대하여 했던 말과 유사합니다. “회개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무섭게 죄를 책망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죽어 있던 양심을 일깨우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양심이 죽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민감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구원의 은혜]에서 회개와 용서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의 경험을 보아도 회개와 용서는 함께 온다. 말씀을 믿고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도 용서받지 못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또 한편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받은 사람도 결코 없다.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개로 동시에 이끌리지 않고도 죄가 씻겨진 경우는 이 하늘 아래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장차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받았다는 느낌은 우리 영혼 속으로 함께 들어오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함께 머문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행동하며 반응한다. 용서받는 사람은 회개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용서 받는다.
회개와 용서를 경험하면 우리 안에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이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은 복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죄로 인한 근심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될 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니 말입니다.
시편 51편 4절에 유명한 다윗의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당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좌에 오른 다윗에게 있어서 한 여인을 취한 것이 왜 죄로 느껴졌을까요?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고 권력을 잡았으니,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더구나 그런 행동에 대하여 누가 감히 왕에게 잘못했다고 질책을 하겠습니까?
다윗의 회개는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누리고 가질 수 있는 마땅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한 신앙인’으로 섰을 때 무섭게 찾아온 질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는 것이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다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능력으로 선행을 행한다고 해서 얼마나 거룩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거룩’은 ‘선을 행함’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직 용서받은 사람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됨으로써 증거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후회’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고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는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가능성도 없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지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관이 됩니다.
회개는 회개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책망이 일어나는 마음속에서 비로소 하나님 아들의 생명이 형성됩니다. 거룩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챔버스가 아주 멋지게 정리해 놓은 문장입니다.
“새 생명의 존재는 의식할 수 있는 회개와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거룩으로 나타납니다. 무의식적인 회개 또는 의식적인 거룩으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묵상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는 의식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의식적인 회개를 지나야 철저하게 달라진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거짓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뼈아픈 회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식적인 회개가 없이 ‘의식적으로’ 거룩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위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선행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룩은 늘 사람들 앞에서만 잘 보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의식적인 회개’를 사람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과거 청교도들은 ‘눈물의 선물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눈물로 뼈아픈 회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그 회개가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