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눅 22:53
한 줄 노트
-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죄의 실체를 바로 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묘사해 봅시다.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53)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 무엇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까? (16-17절)
- 심판과 정죄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8-19절)
- 악인들은 왜 빛을 미워하며 나아오지 않습니까? (20절)
- 진리를 따르는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21절)
-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17절)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하고 이방인들은 심판할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에 사로 잡혀있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 만일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할 목적이었다면 이방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단 한 사람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롬3:23).
믿지 아니하는 자는(18절)
여기에 쓰인 헬라어 ‘메’는 ‘개념’을 부정하는 불변사이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 ‘믿는 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의 행위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무엇과 관계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19절)
‘정죄(헬, 크리시스)’는 ‘심판하다(18절, 헬, 크리노)’는 의미다. 믿지 않는 자들이 심판받는 것은 빛이 왔으나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악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문법 상 미완료형이다. 과거로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변함없이 악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포네라’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그들의 행위가 늘 마귀의 속성과 관계되었음을 나타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 마귀에 속해 있었고 영적 어둠 가운데 있었다.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0절)
‘드러날까 함이요(헬, 엘렝코)’에 쓰인 헬라어의 용례는 지극히 한정적으로 쓰인다. 죄의 폭로, 정죄(딤전5:20, 딤후4:2), 교회의 교정(히12:5) 등에 사용되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밝히 드러내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21절)
진리를 좇는 자들의 2가지 특징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다는 것, 빛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안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엔’은 어떤 존재의 면전, ‘앞에서(before)’를 의미한다. 즉 진리를 좇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충실히, 순수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매사에 임하는 이들은 은폐하거나 빛을 피할 이유가 없다.
죄 인정하기
어제 묵상에서 우리는 ‘죄의 실체’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 죄를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다룰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님이 죄에 대해 설교하던 중에 이런 예화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통경찰이 자동차 사고를 조사하고 있었다. 경찰은 증인들을 면담한 뒤 운전자 중 한 사람을 체포했다. 사고의 모든 책임은 그 운전자에게 있었다. 경찰은 신중하게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때 잘못을 범한 운전자가 무언가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 “당신이 작성한 사고 보고서를 먹고 있다.” 운전자는 사고 보고서를 먹으면 자신의 잘못이 감춰질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신속하게 다음 조치를 취했다. 증인들을 다시 찾아내서 증거들을 재수집한 뒤 새로운 보고서를 완성했다. 물론 가중처벌까지 추가됐다.
죄가 있으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죄는 없다. 죄의 보고서를 먹는다고 그것이 감추어질 리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죄가 우리의 인생에서 ‘실체’라면, 그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 속에 있는 악독과 이기심을 부정한다면,
“… 죄가 당신의 삶을 공격할 때 당신은 죄와 타협하게 될 것이고 죄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우리를 공격할 때, 이런 저런 핑계를 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죄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의 세력’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죄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생관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존 오웬은 [죄 죽이기]에서 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 실체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거룩함의 길에서 죄를 죽이며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여정의 목적지인 거룩함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데 죄의 저항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죄와 싸워서 이기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죄에 대해 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타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죄의 실체와 마주 섰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의 실체를 인정할 때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겸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가 생길 뿐 아니라, 죄성이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도 바울이 사역에 있어서 가장 경계했던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가다가 혹시라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이유는 스스로에게 있는 죄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임을 깨닫는 것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의 시발점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을 향해 냉소적인 태도를 갖거나 의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하시는 일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 중에서 제일 중요한 문장이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의 보호를 받는 자는 진실한 사람이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진실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장 진실하게 서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만큼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죄와 구원]에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진실하려면, 우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 그분의 타오르는 강렬한 거룩을 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이 선포되면 우리는 죄책감을 느낀다. 죄를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이다.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고, 용서하셔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죄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는 존재인지 말입니다. 죄와 유혹에 대하여 솔직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존재라고 자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잘 알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죄가 없는 상태와는 무관한 존재입니다. 아니,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죄의 무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가 죄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직 순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인 우리가 죄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