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계 1:17
한 줄 노트
- 주님의 얼굴을 뵐 때 영광의 광채로 인해 두렵지만, 그분의 손이 닿을 때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묵상질문
주님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에게 절망감이 찾아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때와 달리 지금 우리의 마음이 평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요한계시록 1:17)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누구의 ‘배’를 사용하십니까? (3절)
-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십니까? (4절)
- 베드로가 명령을 거부할 만한 내적/외적인 이유들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5절)
- 순종으로 큰 역사를 본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8절)
-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엇으로 사용하겠다고 부르십니까? (10절)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3절)
예수님과 베드로의 물리적, 심적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일하는 생업 현장으로 ‘찾아오셨다.’ 베드로가 지닌 소유를 주님의 일에 사용하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가 친히 말씀 하셨고, 내외적인 시험에도 불구하고 순종했다. 큰 역사 가운데 죄인임을 고백한 베드로는 그의 소유, 일부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한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5절)
베드로와 동료들은 어업 전문가였다(7절 동무, 헬 메토코이- 전문적 의미의 동업자). 외적/내적 이유로 예수님의 명령에 주저할 수 있었지만 그는 결단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헬, 에피스타테스)’이라고 부른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이나 예수를 따르던 자들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불신자들이나 제자 아닌 자들은 선생이란 호칭에 ‘디다스칼로스’를 사용한다. 이는 베드로의 결단이 믿음의 순종이었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베드로는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실패와 빈손의 절망, 인간적 염려와 근심 중에 있던 생업의 현장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다. 시간과 상황 너머에서 역사하는 예수님을 경험한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통제권을 주님께 위임한다. 제자로서 예수를 따른다.
역설적 진리
오늘 묵상의 제목은 ‘절망 속의 기쁨’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에 대해 챔버스는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우리는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나야만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인생이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 가운데 찾아오는 기쁨이야말로 참다운 기쁨입니다. 챔버스의 표현을 빌자면
“주께서 자신을 내게 나타내실 때 나는 내 안에, 주 앞에 꿇어 엎드려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합니다.”
C. S. 루이스도 [순전한 기독교]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두려움과 기쁨의 이중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변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피조물들은 저마다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뒤덮이든지, 거역할 수 없는 공포에 뒤덮일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최후의 심판 때 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면서, 장엄한 영광에 압도되는 피조물의 반응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공포로 나타납니다. 어떤 면에서 신자는 무한한 영광 앞에 선 유한자로서 절망을 미리 맛본 사람입니다. 챔버스는 이런 절망을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 앞에서 죄로 가득한 우리의 본 모습을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경험했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죽은 자처럼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그 주님의 위엄 앞에 누가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서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얼마나 놀랍고 무섭습니까? 이 무서움은 ‘장엄함’에서 옵니다. 감히 얼굴을 들어 주님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적인 우리의 모습 가운데 기쁨이 찾아옵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 본문은 요한계시록 1장 17절 전반절 입니다. 이어지는 후반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이 오른손은 강요하거나 견책하는 손이 아닙니다. 그 손이 우리의 어깨에 닿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평강과 위로가 찾아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아 그분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을 때,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영광스런 주님이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뵐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절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기쁨도 기대도 소망도 더 밝은 미래도 없는 그러한 어두운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의 기쁨은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알 때 옵니다.”
놀라운 일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내 안에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만 하는 것이 있음을 알고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을 때 찾아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신앙의 역설적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향해 절망할 때까지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 그것도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존귀하신 주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만지시는 순간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그분이 나의 빛이 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