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3
한 줄 노트
-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가치 있는 순종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는 순종은 자발적인가요, 강요된 것인가요?
묵상 레시피
(로마서 8:14-17)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요한복음 13:13)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 종과 양자의 차별 기준은 무엇입니까? (14절)
- 종과 양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15절)
-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언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16절)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
하나님의 영, 성령은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13절) 근본적인 관계의 변화를 허락하신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양자의 관계를 맺게 하신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도, 보호 받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아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남녀 모두를 지칭한다. 16절의 ‘자녀’역시 양성적 용어가 사용되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15절)
종의 영은 세례 이전, 죄와 율법에 사로잡혀 속박과 공포의 정서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노예근성을 갖도록 조장하며 영적 두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초등교사(갈3:24), 초등학문(4:3)). 종과 양자의 차이는 성령의 내주와 관련된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나 친자나 법적 권리 측면에서는 차별이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사용한 ‘양자’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자녀 됨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친자와 차별되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양자’는 우리의 지위가 변화된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였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처음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17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다. 우리는 공동 상속자일 뿐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계된 공동 운명체로서 고난과 죽음에도 동참한다.
1. 자유로움 가운데서
오늘 묵상에서는 챔버스가 계속 강조하는 ‘순종’에 대해 조금 더 명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첫 문장에 주의하십시오.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
“주님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권위’라는 말은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미입니다. ‘권위적’이라는 말도 적절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권위적인 명령으로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완전한 자유’(perfectly fre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느 정도로 완전한 자유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모욕 가운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다니, 완벽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요된 권위가 아닌 ‘진정한 권위’는 그분의 구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때 작동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통치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상태는 오늘 본문처럼 제자들의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이 고백은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 안에 있는 가치 없는 것들만이 가치 있는 분께 순복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주님의 구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순복하면, 우리의 의지는 주님 앞에 자유롭게 순종합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 인생에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상태는 일회적 사건을 통해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순종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신앙에서 ‘교육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도의 교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면이 아니라 거룩한 면에서 우리보다 조금 나은 자들을 사용해 우리가 주님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교육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우리 삶이 주님을 향한 순종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2. 강요가 아닌
묵상 전반부에서 ‘자유’가 강조되었다면, 후반부에서는 ‘강요하지 않으심’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일 순종이 강요된다면 하나님께서 참된 권위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예 감독자가 강요를 통해 노예에게 순종을 이끌어 낸다면, 이것이 어떻게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챔버스는 이러한 순종을 ‘진흙탕에 빠져 있는 순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한 순종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자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는 나의 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순종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참된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순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동등함 속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습니다. 아들이 순종한 이유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들이 되기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순종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주님이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라는 책에서 ‘자발적 순종’을 ‘기쁨’의 단계로 끌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과 같이 순종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순종하셨다. 우리의 순종 역시 하나님의 자녀의 순종이 되게 하자. 하나님을 아들의 영, 자녀의 영으로 섬기자. …… 그리스도는 아들의 사랑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우리의 순종이 사랑의 순종이 되게 하자. 그리스도께서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신 것처럼,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기쁘고 아주 선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종하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순종’ 즉, ‘동등한 관계에서의 순종’은 자녀의 영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아버지께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는 순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