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 24:19
한 줄 노트
-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 의심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우리의 권리를 온전히 포기하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떤 의심으로 가득한가요? 의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마음이 있나요?
묵상 레시피
(창세기17:15-22)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3)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여호수아24:19)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15-16절)
-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7절)
- 아브라함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18절)
- 하나님의 거듭된 말씀과 약속은 무엇입니까? (19절)
- 이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절)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브라함은 태어날 아들보다 눈앞의 아들에게 더 많은 기대와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마엘에 대한 언급이 없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앞날에 대해 초조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이삭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대로의 삶이 있다(20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19절)
이삭은 ‘그가 웃는다’ 혹은 ‘그가 웃을 것이다’는 이름 뜻을 가졌다. 기쁨의 웃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자손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이루실 것이다. 한편,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계획들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했던 그 ‘웃음’이 눈 앞 현실이 되고 성취되어 감을 목도할 것이다.
1. 성찰의 의미
오늘 본문은 어제 다루었던 ‘의지’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경향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어떤 제안을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자신을 의지하는지 점검하는 것이 ‘성찰’입니다.
“‘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실 수 있도록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 이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어제 나누었던 묵상 중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선언하는 의지적 결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을 만큼 친밀함 가운데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1969년 이스라엘 총리로서 연립 내각을 이끌었던 여성 정치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중동 평화를 위해 애를 썼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골다 메이어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에야 사람들은 그녀가 12년 동안이나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골다 메이어 총리는 자기의 약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얼굴이 못생긴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았을 때 너무나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했고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약함은 나에게 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무한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낙심과 실망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입니다."
2. 문제는 의심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하리라’고 말하는데, 백성들은 여호수아 24장 21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챔버스는 백성들의 이런 대답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신중한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우리를 부르시고 이런 일을 제안하실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지적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도, 능력이 있어서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격이 있다거나 뭔가 의지할 구석이 있다면 ‘내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재욱 목사의 [보통의 질문들]에 보면, 자격으로 인해 실망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위로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을 수많은 압박을 버티고 견디는 힘든 삶으로 생각한다. 만약 구원이 취업시장처럼 하나님의 면접을 통과한 사람만 합격할 수 있는 것이라면 힘들고 고된 삶일 것이다. 만약 통과했다 해도 언제 다시 해고 통보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긴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출근 날 아침 회사 가기 싫은 직장인처럼, 신앙은 고달픈 인생살이로 전락한다. 구원은 시험과 면접을 통과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취업 시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라는 합격 통지서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하나다. 그것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이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합격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입사한다.
우리는 깊은 성찰을 통해 ‘의심’이 문제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만일 내가 정말로 믿을 수만 있다면!’ 문제는 내가 정말로 믿으려고 의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지나시며 사람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위대한 성찰은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진심으로 믿었다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허락합니까?”
이제 우리의 문제가 ‘의심’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를 양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실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온전히 내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은 기억하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