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한 줄 노트
-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을 붙든다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외에는 할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요?
묵상 레시피
(에베소서 3:16-21)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마가복음 9:29)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간구는 무엇입니까? (16-17절)
- 바울은 왜 이러한 간구를 하고 있습니까? (18-19절)
-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20절 상반절)
-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20절 하반절)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16절)
속사람은 17절의 ‘마음’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고,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이며 전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이다.’ ‘능력으로’는 앞에 쓰인 ‘성령으로’와 같은 의미다. 성령은 능력과 동의어로 쓰인다(고전2:4, 살전1:5, 롬15:19).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내적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이는 당시 성도들의 신앙이 중보 해야 할 만큼 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절)
바울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는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인간의 유한한 지식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에 담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말한다. ‘넘치는(헬, 휘페르발루산)’은 ‘저편으로 던져 넘기다, 초월하다, 능가하다, 탁월하다’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화된 그 사랑은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한하다(19절). 이는 ‘모든 인류를 수용할 만큼 넉넉하게 넓고, 세상 시간을 넘어 계속 될 만큼 영원히 길고(엡1:4,5),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지극히 높으며, 가장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깊다(엡2:1-3).(존 스토트)’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19절)
‘충만(헬, 플레로마)’은 보통 성부, 성자, 성령의 속성과 사역에 사용되는 단어다(엡1:23, 3:19, 4:10,13, 5:18). 또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상태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을 가지고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20절)
하나님의 ‘능력(뒤나민)’은 창조(롬1:20)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고후13:4), 하늘로 올리시고(엡1:20), 이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롬1:16, 고전1:18) 전체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큰 구원사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간구가 있는 일상에서도 발휘된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넘치도록(헬,휘페렉페릿수)’에 쓰인 헬라어는 ‘넘치다’를 뜻하는 단어의 최상급이다.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를 의미한다.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이틀 동안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시는 이유, 그리고 영적 체험 후에 데리고 내려오시는 이유를 통해 ‘영광과 겸손의 영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사역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차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변화산 체험을 마친 후 예수님과 함께 내려온 제자들에게 직면한 문제를 다룹니다. 변화산 아래 세상에서는 온갖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찾아왔던 사람이 실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기적들을 보고 제자들도 그렇게 기적을 행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너무나 무능력 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8절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는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서 기도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능력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서 나온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제자들처럼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 묵상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어쭈구리’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그 유래를 아시나요? 재미있는 설 가운데 하나는 어주구리(漁走九里)라는 사자성어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어주구리(漁走九里)는 ‘물고기가 9리를 달리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먼 거리를 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이 말은 능력도 없는 어떤 사람이 능력 밖의 황당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고사 성어가 생기게 된 옛날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옛날 중국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예쁜 잉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메기 한 마리가 이 연못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왔다. 그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었다. 잉어는 연못 이곳저곳으로 메기를 피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잉어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다. 잉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뭍에 올라 지느러미를 다리 삼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메기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잉어가 뛰어간 거리는 약 ‘9리’ 정도나 되었다.
잉어가 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것을 목격한 농부가 뒤따라갔는데, 잉어가 멈추자 그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어주구리!’(漁走九里!)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가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에 집중하지 않고 우리의 본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스스로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혹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어쭈구리’라는 말을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적인 변화가 아니라,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역을 감당하다 문제가 생기면 주님께 그것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자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질책하는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 주님과 함께 통과한 그 시험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아주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모든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려오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능력은 내려와서 낮아진 가운데 사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우리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서 경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낮은 곳을 거부하고 그저 높은 곳에 머물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직면하는 실제적인 상황들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붙들고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다면 믿음을 저버린 채 공포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