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한 줄 노트
- 우리의 삶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삶의 동기에 따라 내가 드러나거나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 영적 게으름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인의 실현’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교적 티를 내는 것을 넘어 영적인 향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묵상질문
오늘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향기’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묵상 레시피
(빌립보서 4:2-9)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3:10)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2-3절)
- 성도들에게 권면한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4-8절)
- 이러한 삶이 가능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7절)
-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을 통해 옵니까? (9절)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두 여인은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동체 화합을 깨는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름을 지목하면서까지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바울은 수감생활 중에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기쁨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야 할 덕목이다. 기쁨이 자신을 향한 윤리라면 그 결과 타인에게 ‘관용’할 수 있게 된다(5절).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한다(‘기도와 간구’는 강조를 위한 중복 표현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7절)
‘하나님의 평강’은 인간의 지각, 생각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이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로 한정된다. 인간의 노력이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 이 평화가 온다.
종말론적인 윤리(8절)
‘참되며’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진실 됨을 말한다. 경건은 종교적인 측면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을 가리킨다. ‘옳으며’는 정의로운 판단을, ‘정결’은 의도의 순수성을 가리킨다. ‘사랑할 만하며’는 호감과 기쁨을 주는 덕성을, ‘칭찬할 만하며’는 마음을 끄는 성품을, ‘덕’은 칭찬과 인정을 말한다.
1. 삶의 동기
어제 묵상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3일에 걸쳐 그리스도를 삶에서 실현하는 문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어제는 영적 게으름의 문제였고,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가운데 그리스도를 일상에서 실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성도의 삶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의 동기는 자신의 뜻을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실현하는 삶의 동기로 여기는 사람들은 언제는 자신이 해온 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고 합니다. 수년 전 로잔이라는 단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오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쓴 [I am nothing]이라는 책에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오가 로잔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여! 저를 마가복음 12장의 과부처럼 만들어주소서. 이름도 없고 가난하지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쏟아 붓게 하소서. 그 과부처럼 되기를 열망합니다. 크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기성 지도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우리 주님께는 주목과 긍휼을 받는 종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밤 저를 도우시어 동전 두 닢 어치의 제 가치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쏟아 붓게 하소서. . .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들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아이비리그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네 개의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나는 석사학위 세 개와 박사학위 한 개를 가지고 있다. 우리 누나와 매형, 형님과 아내와 나, 이렇게 다섯 명의 학위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코넬,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받은 것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개다. 그리고 우리 다섯 명 모두가 현재 선교사로서 선교 현장에 있거나 혹은 선교 현장을 향해 가는 중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시아의 부모들이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이것이 비극적인 일이 아니라 엄청나게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든지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으면 성령님께서는 계속해서 같은 상황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2. 성도의 삶
성도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것이 온전한 목적이 된다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이 드러나도록 애쓰게 될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영적 게으름이 ‘자기실현’이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실현’하므로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들의 삶에 모범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장 천한 일을 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일’을 하셨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에서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일들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나’를 실현하기 위해 자꾸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강박관념으로 인해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의무감’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래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의 목적이 된다면 결과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지,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도는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원용일이 쓴 [직장인이라면 다니엘처럼]에 나오는 글을 읽으며 진정한 성도의 영적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p.105 딸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한 쇼핑몰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거기서 딸의 학교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어, 소정이구나. 근데 네 옆에 있는 분 누구니?”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때 마침 휴가 중이어서 반바지 차림에 수염도 기르고 샌들을 신고 간 애비 모습이 창피했는지, 딸이 “으응, 그냥 좀 아는 아저씨야”라고 대답했다고 해보자. 만약 그랬다면 그런 대접을 받은 애비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마 두고두고 석 달 열흘은 나의 딸을 구박할 것이다. 꼭 그런 꼴 아닌가? 우리가 일터에서나 세상에서 예수 믿는 티 안내고 감추고 살면 우리 주님이 이웃 아저씨로 무시당한 아버지의 기분을 느끼신다. 우리는 예수 믿는 티를 내야 한다. 종교적 티가 아닌 영적 티를 내야 한다. 다니엘은 이방의 제국에서 정치인으로 일했으면서도 자신의 하루 일정 속에 기도시간을 세 번 넣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티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도금령이 내려진 것을 알았으면서도 목숨 걸고 그런 용기를 보였다(단 6:10).
p.156 세상 속의 일터에서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업인으로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지위에 있든지 간에 일터에서 능력과 성실함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세상의 일터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널리 선포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다. 다니엘의 선한 영향력을 배우자. 일터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으면 절대로 일터사역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기억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