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1
한 줄 노트
- 우리의 믿음의 강함과 약함은 상황이 아닌 ‘무엇’을 의지하고 신뢰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 비전의 대가를 치르면, 우리가 그 비전을 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꺼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묵상질문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 위해 당신의 삶에서 교정해야 할 성품과 떼어내야 할 정결하지 못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묵상 레시피
(여호수아 1:1-9)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6:1)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시점은 언제입니까? (1절)
- 여호수아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4절)
-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여호수아의 심경은 무엇입니까? (5-6,9절)
- 여호수아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억하며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7-9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1절)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누구보다 가까이서 모세와 함께했다. 모세의 죽음으로 여호수아는 개인적인 애도의 감정을 추슬러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있다. 출애굽 때부터 지속되어 온 모세의 안정적인 지도력을 이어가야 하는 점, 가나안과의 정복전쟁, 백성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일 등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부담은 매우 컸을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9절)
하나님은 여호수아 앞에 놓인 모든 것의 길이 되신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에 대해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완료형)’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준 것’으로 표현하여 이 약속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신다. 여호수아가 할 것은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며 기록된 대로 행하는 것이다. 주야라는 말은 ‘밤낮’을 넘어 ‘모든’이라는 전체의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사람’이 ‘항상’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히, 하가)’은 새가 ‘구구구’ 울거나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로 ‘낮은 소리로 읽다’, ‘자신에게 말함으로 깊이 생각하다’는 의미다. 말씀을 늘 중얼 거리며 암송하거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시편1편 참고).
여호수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 중 단연 최고의 약속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일 것이다. 모세(출3:12), 예레미야(렘1:8), 제자들(마28:20) 모두 이 약속을 받았다. ‘여호와의 종’으로 서는 일, 정복전쟁, 율법을 늘 묵상하고 깨닫고 행하는 일 모두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
1. 믿는 것이 사라질 때
오늘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죽었다는 것은 큰 손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의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을 들어 새로운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비전의 대가’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가지기 위해서는 포기하거나 놓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니, 귀하게 붙들고 있던 것을 놓으므로 인해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걷다보면 주님께서 종종 우리의 ‘영웅들을 사라지게’하십니다.”
여기서 사라지게 하셨다는 말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믿었던 영웅들이 죽었다고 역사가 끝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족하고 쓰러지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여기는’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영웅들이 사라질 때’도 그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할 수도, 아니면 강하게 할 수도 있는 선택 가능한 상황입니다. 비극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따라 봐야할 것을 보여 주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기독교의 진리]에 나오는 내용을 좀 더 보겠습니다.
모든 상황은 당신의 믿음을 약하게 하거나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당신을 어디에 두시든지 전적으로 헌신하십시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해 순종하십시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왕좌왕 사는 정신없는 삶 대신 우선순위를 지키며 성실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지켜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주 안에 거하면 잠을 자더라도 육적인 충전뿐 아니라 영적인 충전을 얻을 것입니다.
2. 성품이 결정한다
챔버스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품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성품’이 ‘계시’를 결정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성품이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 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준비된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챔버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또한 보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기 전에 내 성품 안에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는 나는 일반적으로 내 편견에 따라서만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일치되는 성품은 ‘거듭남’과 관계가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하늘나라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서 하늘나라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다스림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죠. 챔버스는 이러한 성품을 가지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외적인 사건의 수술’ (surgical operation of external events)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정결’ (internal purification)입니다.
오늘 묵상 글에는 이 두 가지 요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적으로 저의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 설명해 보겠습니다. ‘외적인 사건’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특히 우리의 비전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사건들이죠. 그 때 우리는 그것을 사건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파헤치고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수술한다는 것은 아픈 일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비전의 대가’만큼이나 아프지만, 사건들을 파헤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된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내적인 정결’이란 늘 그렇듯이 깨끗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어쩌면 내적인 정결을 통해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내는 것이죠. ‘정결’이란 정결하지 못한 것을 떼어 낼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A. W. 토저는 [하나님을 추구함]에서 이러한 태도를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를 찾으려는 결단을 해야 하며, 그러고는 단순함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나 그러했듯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지식 있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깊은 어둠 속으로 감추신다. …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모든 노력을 벗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간사함 없이 솔직하게 나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의심할 것 없이 하나님은 속히 반응을 보이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을 찾자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찾자는 나쁜 습관이, 완전한 모습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지만”이라는 말 속에 우리의 무서운 적이 있다. “그렇지만”을 빼어 버린다면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분 안에서 우리 생애 전체 동안 비밀히 갈망해 온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토저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과 솔직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데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이거나, 더 좋은 길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제거하는 것, 즉 “그렇지만”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처음도 하나님이요 둘째도 하나님이며 셋째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온 세상에서 나의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 밖에 없습니다.”
비전은 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비전을 위해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전을 따라 기꺼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보시도록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