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한 줄 노트
- 인생의 목적이 ‘안일함’이 아니라는 말은 불의 가운데에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 영적 자극에 민감해야 영적 게으름에 빠지지 않습니다.
묵상질문
열정적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영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12:49-53)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던지러 오셨습니까? (49절)
- 예수님은 세상에 무엇을 주시러 오셨습니까? (51절)
- 분쟁은 어디에서, 어떤 관계 사이에서 일어납니까? (52-53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49절)
구약에서 ‘불’이란 하나님의 형벌적인 심판이나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려고 정화, 파괴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
예수님은 평화를 주러 이 땅에 오셨다(2:14). 그러나 평화가 온전히 실현되기 전에 큰 환난의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악의 세력 간의 싸움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심판의 활동들은 ‘새로운 세대’와 ‘옛 세대’ 간의 분쟁을 가져올 것이다. 어디에 속했는지에 따라 각각에 연합과 대립의 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1. 잘못된 목적
오늘부터 우리는 3일에 걸쳐서 그리스도를 삶에 실현하는 문제에 대하여 묵상할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것과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정반대 개념임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게으름’이 자아실현과 관계있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안전한 삶’이라면, 우리는 모두 영적 게으름뱅이가 될 개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안일한 삶에 빠지지 말고 서로를 격려하며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왜 이렇게 서로를 격려해야 할까요? 우리 삶이 개인적인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이런 권면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에 보면 이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줄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며, 그가 회의와 절망에 빠질 때마다 다른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기만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돕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룩한 구원의 말씀을 담아서 전해 줄 형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형제의 말씀 속에 계신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불확실하지만, 형제의 말씀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확실합니다.
“사실 혼자 멀리 떨어져서 은둔의 삶을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영적인 삶과 정반대의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삶이 분명해지고, 영적으로 분명한 삶은 게으름으로 빠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불의와 불안정한 삶 속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이러한 시험은 우리를 영적 게으름으로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안일함’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됟다면 이와 같은 시험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뒤로 물러나 주저앉거나,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생동감
영적 게으름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안일한 삶의 목표를 위해 기도를 사용하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자신을 속입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 영적 게으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지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안정과 기쁨을 얻기를 원할 뿐이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단지 기쁨과 안정을 얻으려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고귀함을 잃어버리고 천박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쁨과 안정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험지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순종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삶에는 영적 생동감이 없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안정은 바른 길을 걸으며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열매이지,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성경연구원 [사람을 세우는 사람 231호 : 게으름을 극복하라]에 보면 사사기 4장의 드보라 사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를 설명한 부분이 아주 인상적 입니다.
사사기 4장을 보면 한 여인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여자를 사사로 세웠을까?”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녀의 평범 속에서 그녀만의 비범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드보라의 종려나무’(삿 4:5)라는 구절에서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드보라가 그냥 한 ‘종려나무’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한 것이 아니라,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라 말하며 그 종려나무에 대하여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종려나무는 어떤 종려나무였나? ‘드보라의 종려나무’였다. 이것은 그 종려나무와 드보라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말이며, 더 나아가 드보라의 삶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분명했기에 종려나무 아래 거주하며 소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종려나무 아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것이 소문이 나 어느덧 그 자리는 드보라 만의 자리가 된 것이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결국 종려나무가 된 것이다. 드보라의 소명이 그렇게 그녀를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사람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베드로후서 1장 13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사람들은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에 의한 자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적 활동’과 ‘적극적인 활동’은 다릅니다. 혹시 ‘적극적인 활동’이 영적 활동의 모조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영적 게으름의 문제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영적 자극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영적인 면에서 홀로 격리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영적 은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서로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옆구리를 찌르며 격려해야 합니다. 영적 게으름뱅이가 되지 않도록 늘 주의 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