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 6:25
한 줄 노트
- 염려가 아닌 ‘분명한 우선순위’가 우리 삶을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만듭니다.
-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할 때 찾아옵니다.
묵상질문
당신이 오늘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하는 염려는 무엇입니까?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17:14-21)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마6:25)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왜 ‘광야’의 시간을 주셨습니까? (2,5절)
- 광야 시간 후에 무엇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1,7-10절)
-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묵상해 보십시오.
- 하나님은 무엇으로 광야를 견디게 하십니까? (3절)
-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3-4, 6-7절)
- 모세가 백성에게 당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3절)
만나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식품이었다. ‘광야’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만나가 그쳤다(수5:12). 만나에 관한 소식, 방식, 일정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떡’도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생계를 위한 물질은 필수적이다. 하나님도 이를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
1. 우선순위의 문제
오늘 말씀은 5월 18일부터 묵상한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마태복음 5-7장까지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6장을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6장에서도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바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통 ‘염려’를 ‘사려 깊은 행동’ 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챔버스는 염려가 죄요, 불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살펴본 일반적인 염려에 대하여 예수님은 ‘불신앙’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염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트 챈들러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인생]이라는 책에서 갑작스레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고, 이 투병을 통해 온 가족이 신앙의 성장을 경험한 마이클 켈리의 말을 인용합니다. 켈리는 염려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염려하는 아빠였고, 그 점이 께름칙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염려는 나쁜 것이다. … 사실 우리에게는 염려할 것이 많다. 어떤 면에서 염려하는 것과 준비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염려는 책임감과 결부된 것 아닌가? 퇴직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가? 생명보험을 들지 말아야 하는가? 장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가? 책임과 염려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염려에 그토록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 외줄타기처럼 위태한 이 시대에 우리가 장래를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입증하는 셈이다. 우리가 장래에 대해 안달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으로 손을 쥐어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확신은 안전망 없는 삶과는 다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계속해서 물으십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나 휴가 계획,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저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첫 번째로 고려할 때까지 계속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 삶에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다면 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성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아버지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최선은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알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① God first! ② Family second! ③ Job third!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이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도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먼저 고려할 때마다 혼돈이 있게 됩니다.”
2. 염려 내려놓기
염려가 옳지 않은 것을 넘어, ‘불신앙’인 이유가 있습니다.
“염려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돌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광야에서 주신 ‘만나’를 생각해 보세요. 매일 매일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내리는 만나는 각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또 만나를 주실 것이니, 그 날 필요한 것 이상을 거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꼭 여분의 만나를 거두어 갔습니다. 그러면 그 여분은 다 썩어서 버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식량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 믿음으로 염려하지 않도록 가르치신 것 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신’ 외에는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이 생각나지 않고, 삶에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염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질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염려에서 벗어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불신앙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종이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위대하신 말씀은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에 나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네가 무엇을 원하기에 그토록 밤낮으로 부르짖느냐?”
그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 무엇을 주시려거든 차라리 주님 자신을 제게 주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무신론자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회심한 이어령씨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책에서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나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백합처럼 비단을 짜 몸을 치장할 줄 모릅니다.
당신이 아니 계시면 추워서 떨고 배고파 울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하늘을 나는 새, 들판에 피는 백합도 부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부터 날개가 없어도 하늘을 날고 베틀이 없어도 베를 짭니다.
그래도 근심 걱정이 남아 있어요. 당신이 너무 먼 곳에 있어 보이지 않을까 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