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1
한 줄 노트
- 내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기도의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상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아들의 능력으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묵상질문
내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생각해봅시다. 상식적인 기도인가요, 주님을 의지하는 기도인가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2:1-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ㄱ)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요한복음 11:41)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동방 박사들은 왜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습니까? (1-2절)
- 그들은 무엇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왔습니까? (2절)
- 그들이 헤롯왕(왕궁)에게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
- 헤롯왕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4,7-8절,2:16절)
- 성경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곳을 어디로 기록했습니까? (4-6절)
- 박사들은 다시금 무엇의 인도를 받습니까? (9-10,12절)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럼에도 유대 신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그들은 태어날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자 예루살렘에 왔다. 이 단어는 ‘무릎을 꿇고 절하며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 경배할 때(14:33), 부활하신 예수를 대하는 태도를 가리킬 때(28:9,17) 사용된 단어이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정작 이 소식을 들은 헤롯왕과 예루살렘은 듣고 소동했다(3절). ‘소동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 공포로 발칵 뒤집힌 상황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방인이라 선지자의 글을 알 수 없었다. ‘왕’은 ‘수도’에서,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상식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다시금 별의 인도를 받아 간 곳은 8km정도 떨어져 있던 베들레헴이었다.
왕이, 물으니(4절)
‘물으니’에 쓰인 헬라어 문법(미완료)에 의하면 헤롯왕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거듭 다그치며 사안에 대해 묻고 있다. 헤롯은 본래 유대인과 에돔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유대인들은 헤롯 왕의 정통성에 의문을 던졌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성전을 확장하는 등의 노력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것은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았다. 헤롯은 세 아들, 아내, 장모, 처남까지도 의심하여 처형한 매우 비정하고 불안한 인물이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냐?’는 동방박사들의 물음은 결국 참혹한 영아학살을 불러오게 된다.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9절)
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질문하던 당시 사라졌던 별이 ‘문득’ 다시 나타난다.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이끈 것은 헤롯과 대제사장, 서기관의 말이 아니라 ‘별’이다. 그 별은 아기 예수,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곳으로 정확히 그들을 인도했다. 동방박사는 이후 ‘지시’하심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1. 아버지를 의식하는 기도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장 4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말이죠. 어제 묵상에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 아들의 기도도 들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잘 알려진 E. M. 바운즈는 [기도의 진실]이라는 책에서 이런 주님의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아버지께 즉각적으로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되는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였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아버지” 하고 부르셨다. 또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적 기도에서 눈을 들어 “아버지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개인적이고 친근하고 아버지께 하는 기도였다. 또한 그의 기도는 강력하고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는 기도였다.
챔버스는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모범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관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가 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고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은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아들의 베들레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기회를 얻고 있습니까?”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하나님이셨던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장소가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이라는 말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역사하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의 은혜로 베풀어주신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특권은 얻었지만 그 기도의 능력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게 발생하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평범한 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도록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그 날이 언제인가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주님과 하나 되도록 하는 날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우리는 ‘단순함’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단순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내 안에 계신 주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도 주님과 동일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2. 상식이 아닌
자, 이제 우리가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주님과 하나 되어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만족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만족시키고 있나요? 챔버스는 오늘 묵상 글에서 우리가 ‘상식’을 따라 사는 것은 ‘영적 침체’ 가운데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상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그분의 아들이 주신 선물은 아닙니다. 그분의 아들이 주신 선물은 초자연적인 감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여전히 ‘상식’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영리’라는 전도 교재를 가지고 한 번쯤 공부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 중에서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있는 의자에 누구를 앉힐 것인지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도록 의자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이 의자에서 내려와, 초자연적인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그 의자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상식은 아버지를 결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챔버스의 이러한 표현이 아주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상식은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아들이 앉아 계시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기도하지만, 상식이 앉아 우리를 좌우하면 결코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 되었는가? 하나님을 알아보는 자만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매 순간 ‘우리 몸’을 통해 역사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란 우리의 유한한 육신에 영원하신 아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온전히 우리 안에 계신 아들을 의존할 때만 ‘매 순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A. W. 토저가 [믿음에 타협은 없다]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요일에 기도하지 않아서 목요일에 링 바닥에 드러눕는 일이 없도록 하라. 기도 없이 월요일을 보내 화요일에 케이오(KO) 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지 말라. 오전 7시에 기도를 빼먹으면 오후 3시에 원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