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한 줄 노트
-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때, 그 아픔이 클수록 진정한 용서를 경험합니다.
묵상질문
용서를 경험한 우리는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진정으로 애통한 경험이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열왕기시편 32:1-11)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요한복음 16:8)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하나님이 시인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2,5절)
- 시인이 자복과 자백을 통해 얻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3-5절)
- 이제 시인은 무엇을 기대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6-9절)
-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시인은 무엇을 고백하며 권면합니까?(10-11절)
허물, 죄, 정죄(1-2절)
하나님은 시인에게 솔직하게 죄를 고백하고 토설하도록 요구하신다. 시인은 ‘죄’를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허물(히, 페샤아), 죄(히, 하타아), 정죄(히, 아온). 이 단어들은 동일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데 ‘강조’를 위해 반복하여 사용되었다. 의미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고 거기서 이탈해 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5절)
시인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백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과 어긋난 관계에 있었을 때에는 그 눌림이 얼마나 심했는지 더 이상 나올 진액이 없을 만큼이었다(여름 가뭄에 마름).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뇌와 황폐함을 뜻한다. 그러나 자백하는 즉시 주께서(히, 붸아타) 죄악을 ‘사하셨다(히, 나사타).’ 이는 ‘죄의 짐을 짊어진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죄를 ‘들어 올리실(lift up)’뿐 아니라 ‘들어 올려 내어 버리신다(lift away).’ 하나님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를 원하신다. 진실 된 관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대속적 죽음을 이루셨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
오늘 챔버스가 다루고 있는 죄의 문제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깨닫게 되는 죄는 무엇이 다를까요?
“그러나 성령에 의한 죄의 책망은 땅 위의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단 한 가지 관계만을 고려하게 하는데,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보면 성령의 책망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후회와 진정한 회개의 차이를 말하며, 성령님의 책망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생각하며 겸손을 유지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령님이 죄를 책망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반면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죄의 가책만을 원한다. 가인의 ‘후회 체험’이 전형적인 것으로서 아마도 그보다 덜한 죄악을 범했어도 그는 후회를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 실제 살인자는 적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잠정적으로 살인자들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라고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길 때 늘 겸손을 유지하는 비결은,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현실적으로 어떠한 존재였을 지를 성령님에 의해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무섭게 책망하실 때 찾아오는 것은 절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무서운 죄를 보게 하신다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까요? 챔버스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정의감을 갖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깊숙이 무서운 죄성을 깨닫게 하실 때 그 두려움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신다고 해도, 우리 속에 있는 정의감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무섭게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정으로 용서하는 것과 성령의 책망을 통해 용서의 경험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책 [구원의 은혜]에 보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면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는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 우리가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그 죄를 없앨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탕감해 주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신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가 그분에게 범한 죄를 지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챔버스를 통해 배우는 아주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구속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골고다 십자가의 희생물로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용서함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중요한 의미는 단순히 구원을 받고 천국의 특권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용서는 내가 죄사함을 받아 다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 것은 기적입니다. 개별적 인간이 주님의 성품을 갖는 것은 기적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에 맞게 변화되는 것은 기적입니다. 오래전 ‘밀양’이라는 영화 때문에 크리스천들의 마음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한 주인공이 참 어렵게 형무소로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는 평안합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절규하며 하나님을 떠납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은 아직도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말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용서받는 것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서받을 때, 사실은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회개하는 것이 바로 용서와 회개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용서로 들어가기 위해 회개할 때, 얼마나 애통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힘들어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으로 용서받은 우리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