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요 15:15
한 줄 노트
- 주님과 친밀하다면 ‘항복’과 ‘자기 희생’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새로운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 주님과 친구가 되는 것은 실제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눈을 온전히 주님께 고정하기 위해서는 이루어야 할 희생이 있습니다.
묵상질문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당신이 희생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무엇을 희생할 수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민수기12:1-10)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요한복음 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미리암과 아론은 무엇 때문에 모세를 비방합니까? (1-2절)
- 모세를 향한 비방에 반응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4절)
-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있어 두 사람과 모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6-8절)
- 미리암과 아론은 결국 어떤 일을 겪게 됩니까? (9-10절)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2절)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새로 맞이한 구스 출신 아내로 비방을 시작한다. 그러나 본심은 ‘지도력’에 대한 그간의 불만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오로지(히, 라크) 모세를 통해서만(히, 아크) 말씀하셨느냐.’ 출애굽 당시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출4:16). 미리암은 여선지자로 기억된다(15:20). 모세를 도운 70인의 장로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민11:24). 그들은 자신의 역할, 헌신과 희생,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불화와 말거리의 대상으로 삼았다.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4절)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모세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방을 들으셨다(2절). 모세는 그 일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신해 말씀하시고 변호하신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다(3절). ‘온유한(히, 아나브)’은 자신을 낮은 자로 간주하는 자세를 가리키며, 시편에서는 ‘헌신적인, 신뢰하는’이란 뜻으로 사용된다(시22:27).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공손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의 시선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고정되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두 사람을 회막으로 나오라고 부르신다. 모세를 대신하여 시비를 가릴 ‘법정’으로 그들을 부르신다.
환상으로, 꿈으로(6절)
하나님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환상과 꿈은 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신명기는 참 선지자를 ‘꿈꾸는 자’가 아니라 ‘직접 말씀 하시는 자’ 라고 말한다(신18:14-20, 렘23:28 참고).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않으신다(8절).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으며, 계시의 순간 그의 의식이 뚜렷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이 지나가신 형상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다(출33:21). 하나님은 모세를 ‘충성되다(히, 네에만)’라고 인정하신다. ‘믿을 만한, 신뢰받고 있는, 충실한, 견고한’이란 의미이다. 모세는 감각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보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온전히 거하므로 똑똑하게 보고 느끼는 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떠나시매(9절)
이로써 미리암과 아론이 지녔던 예언자적 은사도 사라져 버린다. 미리암의 회복은 모세의 중재로만 가능해진다(11절). 미리암은 중증의 피부병으로 진 밖에 거하게 된다. ‘진 안은 정결한 공간이며, 생명과 질서가 있고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 공간이다. 진 밖은 죽음과 혼돈, 버림의 공간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주장하던 이들의 불만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끝난다.
1. 자기 희생
오늘 묵상의 제목이 조금 아쉽습니다. 원문 제목은 ‘우정의 열매(풍성함)’(The fruitfulness of friendship)로 긍정적 의미인데, 번역본은 부정적인 의미의 ‘성도의 애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의 애착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연적인 본성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주님과 진정한 친구 관계를 통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우리와의 친구 관계가 ‘기쁨’과 연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기쁨이 없다면, 굳이 그런 관계가 필요할까요?
이와 같은 친구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자기 희생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항복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얼핏 ‘어떻게 희생에 기쁨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희생해도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진정한 희생이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주님과 친밀해질 때, ‘자기 희생’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열정’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기 희생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와 늘 하나 되어 사역하셨던 주님은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희생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기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오는 참 기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2. 방해물 제거하기
제가 설교할 때 종종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욕망이 죄는 아니지만 욕망대로 사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자연적 애착’이 주님과의 진정한 친구 관계에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적 애착’보다는 ‘육적 애착’으로 읽으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애착(육적 애착)들이 사랑 안에서 행하는 당신의 삶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자연적인 애착(육적 애착)을 제거하려면 그것을 혐오하면 됩니다. 성도의 애착은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어제, 기도가 ‘종교적 감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응답되는 기도가 시작됩니다. ‘자기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감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은 성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일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을 시작하며 챔버스와 오버랩 된 사람이 있습니다. 1월 1일 첫 묵상에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오늘 기꺼이 자신의 삶을 드렸던 바보 의사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의 삶이 완전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이 아름답게 빛났으며 그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책을 엮은이의 글이, 오늘 주님의 친구로 살았던 자의 열매를 생각나게 합니다.
2008년 5월쯤, 한 신실했던 청년이 남긴 글을 엮어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작가인 저는 그 청년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니홈피를 가득 채운 수많은 추모 글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현 형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글, 헌혈증이 필요하다는 글, 제발 툭툭 털고 일어나라는 글, 그리고 기도, 기도, 기도들. 33세, 군의관으로 복무 중에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소천 했다는 그 청년과의 예기치 못한 대면이었습니다. 그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었습니다. 깊은 영성과 지성, 만만치 않은 글 솜씨, 그리고 약자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의사와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마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청년의 순수함이 느껴졌습니다.
(중략)
그 청년이 완벽한 인격은 아니었습니다. 수줍고 외로운 성격에 크리스천다운 모범을 보이려 애쓰느라 남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그의 허물은 사라지고 그의 사랑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의 삶을 엮으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일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타인을 배려했으며,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에 주목하실 거라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입니다. 새 생명을 가진 자가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면, 옛 생명과 옛 생활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야 합니다. 옛 삶에 대한 애착을 혐오하고 오로지 주님과 우정을 나눌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우정에서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한 가운데 자기 희생을 치렀을 때,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주의 빚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의 애착은 자기 희생의 열매를 낳습니다. 자기 희생을 통한 ‘주의 빚으시는 역사’가 언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그분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