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고전 13:4
한 줄 노트
-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위한 결심이나 이유는 필요 하지 않습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만일 노력이 필요하다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묵상 레시피
(로마서 5: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3:4)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되었습니까? (1,10-11절)
-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어떤 위치에 서 있게 되었습니까? (2절)
-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들이 감내할 수 있는(해야 할) 삶은 무엇입니까? (3-4절)
- 이러한 삶은 궁극적으로 어떤 형태를 띄게 됩니까? (5절)
화평을 누리자(1절)
‘누리자’라는 헬라어는 가정법 청유형으로 ‘화평을 가지고 있다’, ‘이미 얻은 것의 소유를 즐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얻어 가지고 있으니 이를 누리자’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화평은 헬라적 개념보다 히브리적 ‘샬롬’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거리낌이 제거된 소통의 관계, 모든 것이 충만하고 충분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2절)
우리는 죄인으로서, 피고인으로 심문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로 인해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사면’받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서 있는’은 완료형 시제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이루어진 ‘사면’, 의인의 신분 상태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들어감을 얻었다.’ 이는 사면상태 뿐 아니라 예배자가 성소로 진입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엡3:12).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이에게 예배는 필연적인 반응이다.
환난, 인내, 연단, 소망(3-4절)
환난은 외부적 환경에서 오는 역경, 마지막 날 임할 우주적 재난을 가리킨다. 성도들이 신앙의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감내하는 핍박과 고초다. 인내는 ‘역경, 고난 아래 머물다’라는 의미로 굽히지 않고 참아내는 것을 뜻한다. 연단은 ‘검증 받은 자질’, ‘훌륭한 덕성’이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
‘부은 바 됨이니’는 완료형으로 쓰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예수를 통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하나님 사랑의 효력은 지속적으로 미친다는 것이다. ‘쏟아 붓는다’라는 헬라어 표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부어진 사랑이 불가항력적이며 압도적인 무게임을 가리킨다.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요4:19). 사랑이 어떻게 임하고, 그 사랑을 어떻게 아는 가는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령은 하나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보증’하며 동시에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기능 둘 다를 수행하신다(고후1:22, 5:5, 8:15-17, 갈 4:6).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
돌아가신 안병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해야만 하는 사랑이 해지는 것이다!” 오늘 말씀과 아주 잘 맞는 말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사랑은 미리 생각해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고민하는 것이 ‘사랑’ 아닐까요? 우리가 사랑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을 생각해 보고, 어떤 공식이 없을까 고민도 해보지만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 노력하고 주님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보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굳이 그렇게 결심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득 우리 삶의 자취를 바라보았을 때, 주님을 따르는 자신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바로 우리 안에 ‘자발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사랑을 챔버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의 샘은 하나님 안에 있지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적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저절로 된다’라는 말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거나 갑자기 사랑이 툭 튀어 나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노력이 아닌 성령님의 역사로 사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맥스 루케이도의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사랑]이라는 책을 보고 ‘747 법칙’이라는 제목으로 교인들과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 말씀에 근거한 사랑의 법칙입니다. 여기에는 주님께 용서 받았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어드렸던 그 사랑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애초에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지만, 사랑 받는 삶을 살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747 법칙’은 먼저 사랑을 받은 다음에 사랑을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에 향유 옥합을 부었던 여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우리는 사랑을 짜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은 먼저 사랑을 받는 것 아닐까요? 사랑은 받아야 줄 수 있는 법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챔버스가 명확하게 이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주께 증거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한 번 여러분의 과거를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려고 결심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님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절로 우러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순간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전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습니다.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슨 일을 하나 해도 늘 계산이 앞서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일을 하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따로 결심을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사랑의 샘’(The springs of lov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샘’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퍼서 쓰고 나면 또 솟아난 물이 채워지는 것이 샘입니다. 성령 안에 우리가 거할 때, 그 사랑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만큼 사랑했으면 끝날 만도 한데, 또 사랑이 솟아납니다. 솟아나는 사랑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이 바로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의 사랑]에 보면 오늘 말씀을 잘 요약한 글이 있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사랑과 생명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주의 특별한 은혜 때문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원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거야”라고 추상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실제로 억울한 일을 만드는 원수가 생겨나도 그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요점은, 사랑의 샘은 우리 안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을 할 때 왜 하냐고 질문을 받으면 아무 대답할 말이 없다. 그냥 사랑의 속성에 따라 저절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흉내는 가능하다. 우리는 사랑을 가장할 수 있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사랑은 자발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