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고전 1:2
한 줄 노트
-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 ‘깨어짐’은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의 시간이 됩니다.
- 비전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비전을 실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묵상질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인가요?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오늘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묵상 레시피
(여호수아 18:1-4)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고린도전서 1:2)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아직 유산을 받지 못한 지파는 몇 지파였습니까? (2절)
- 그들은 여호수아로부터 어떤 책망을 받았습니까? (3절)
-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까? (4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1절)
이스라엘은 ‘실로’ 지역에 회막을 세웠다. 그 지역이 완전히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곳에 성소를 세울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과 안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3절)
일곱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지 않고 지체했다. ‘주신(히, 나탄)’은 완료형으로 이미 하나님이 땅을 주시는 행위가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은 받으러 가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 앞에 ‘안주’했다. ‘지체하겠느냐(히, 미트라핌)’은 ‘느슨하다, 풀어지다, 해이함을 보이다, 용기 없음을 보이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미 주신 땅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태만하다. 간절함도 감사도 없다.
그들의 기업에 따라(4절)
‘따라(히, 레피)’에 쓰인 히브리어에는 신체기관인 ‘입’을 가리키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일곱 지파가 땅을 돌아보며 기업을 그리는 기준은 ‘입에 따라서’였다. 즉, 지파의 구성원들이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땅을 말한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각각 누릴 수 있는 분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복에 소외된 이는 없다. 그 복은 부족함도 넘침도 없으며 가장 적절하며, 선하며, 만족스러운 것이다.
1. 깨어짐을 통해
비전을 보는 것과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비전을 보았지만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 비전을 이루지 못할까요? 챔버스는 계속해서 변화산 정상에서의 체험과 계곡으로 내려와서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비전을 보는 곳은 변화산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산에서 내려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계곡입니다. 우리가 비전을 가진 자로 살아가면서 선택받은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본 비전대로 되려면 반드시 우리를 다듬는 충격들이 오게 되는데, 이에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살아내는 계곡은 우리의 삶에서 부딪치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깨어짐’의 과정입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모루’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망치로 한 번 두 번 맞을 때마다 부수적인 것들이 떨어져나가고 비전의 순수함만 남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프고 힘든 것이죠.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깨어짐의 영성’이라는 표현인데, 깨어짐만큼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아봐야, 든든한 반석이신 주님을 조금 알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리고 아픈 금이 생겨봐야,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잃어봐야,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깨어짐이 우리에게 참 커다란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2. 비전을 알게 되는 때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전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깨닫고 이루어 가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전을 깨닫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 비전을 이루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상에서 받은 비전을 ‘추억’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황홀한 경험을 현실에서 살아 내는 것입니다. 챔버스에 의하면,
“곧 그 비전의 빛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살아감으로 그 비전이 진짜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아시아로 가려던 사도 바울의 방향을 성령께서 유럽으로 바꾸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빌립보로 향하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죠. 중요한 것은 감옥 안에서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고 기도했으며, 그 안에서 확실하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실현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옥문이 열리고 도망갈 기회가 생겼으나, 이들은 도망하지 않고 옥을 지키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이 순간 바울에게 주신 비전이 실체가 되었습니다.
비전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찮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아가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전의 성취는 온전한 주의 다스림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이 표현도 아주 좋습니다.
“‘나’라는 낮은 자아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언제나 골을 냅니다. 주님의 분노 앞에서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시들게 하십시오.”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마십시오. 주지 않은 것은 진정한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의 계획 앞에 우리가 복종할 때, 완벽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