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요일 3:2
한 줄 노트
- 불확실한 인생에서 기대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묵상질문
지금당신의 삶에서 안개와 같이 불확실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인한 기대감이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출애굽기 13:17-22)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3:2)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 출애굽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17절)
- 불확실성 가운데 백성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들은 무엇입니까? (17절)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17절)
본문은 홍해를 만난 사건이 바로의 손에서 완전히 놓임 받은 후였음을 암시한다(히. ‘솰라흐’의 piel 형태, ‘보냈다’).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도 홍해와 같은 거대한 장애물, 사건들을 만날 것이다.
마음을 돌이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17절)
‘돌아갈까’에 쓰인 히브리어 ‘펜’은 있음직한 사건을 방지하는 의미를 가진 접속사이다. ‘돌이켜’에 쓰인 히브리어 ‘인나헴’은 재귀형으로 ‘스스로 후회하다’, ‘스스로 뜻을 돌이키다’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연약한 영적 상태를 아시고 이동 경로를 예비하신다. 하나님은 불확실성 가운데 일하실 주권자시다. 또한 불확실한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아시고 돌보시며 훈련시키실 의지와 주권도 그분께 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19절)
요셉은 불확실성의 은혜를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좋았던 시절에 성공한 인생으로 칭송받으며 애굽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셉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다. 사후, 유골이라도 신앙의 여정에 동참하고자 유언을 남겼다. 불확실성의 은혜는 가시적인 성공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여정 자체임을 알게된다.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22절)
‘떠나다’에 쓰인 히브리어의 용법을 보면(부정어 ‘로’뒤에 미완료 형이 쓰일 경우) 영원한 금지, 계속되는 금지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앞에서 영원토록, 계속적으로 떠나지 않도록 조치하셨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한 시점의 상황에서(광야생활) 뿐 아니라 영원토록 보호하신다.
‘불확실성의 은혜’ – 믿는 자의 특권
오늘 제목은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불확실성의 은혜’는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챔버스가 1916년 10월 15일 주일 오전 성찬 예배에서 설교한 내용 중 일부라고 합니다. 당시 챔버스는 수개월 동안 수에즈로 가서 사역하다 다시 자이툰 부대로 돌아와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자이툰에 새로운 부대가 들어섰는데, 임시로 머물면서 새로운 무기와 신호 장비의 조작법을 배우던 장교와 군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불확실성 앞에 놓인, 곧 전쟁에 파견될 사람들인데, ‘불확실성’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교를 어떻게 들었을까요?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불확실성’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계획적으로’ 되는 일을 안전하다 말하고, 성공적이라고 표현합니다.
“확실성은 상식적인 생활의 표지입니다. 은혜로운 불확실성은 영적인 삶의 표지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불확실성’은 영적으로 확신을 누리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 삶이 불확실한 것은 불안의 요소도 되지만 ‘기대’의 요소도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하고 믿을 때, 현실의 불확실성은 내일의 기대로 가득 찹니다. 챔버스는 오늘 아주 중요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단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
우리가 자신의 특별한 관념을 주장하고 옹호하려고 할 때 우리 안의 믿음은 죽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의 믿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은 것이 우리의 관념인지, 하나님인지 말입니다. 홍민기 목사님이 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라는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홍 목사님은 저에게 동생 같은 목사인데, 이 글을 쓸 당시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가장 친밀하게 하나님을 경험 했던 때의 고백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소신껏 행하는 것이다.
신앙에서 가장 못된 것은 자기가 중심 되는 것이다.
신앙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신앙에서 가장 타락한 것은 자기의 원함대로만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삶의 속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삶의 속성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신을 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결코 영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불확실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다음에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 불확실할 뿐입니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이해 안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확실히 믿으면, 우리의 이해와 상관없이 영적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에 대한 예화입니다.“목사님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십니까?” 누군가 물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대답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나의 미래를 누가 붙들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확실하게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쥐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만 확신할 경우 자신을 매우 고상하고 의롭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할 때, 늘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자신을 남보다 ‘낮게’ 여깁니다.
챔버스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우리의 이해와 삶을 ‘양도’하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확실하게 느껴질 때, 우리의 삶에 넘치는 기대와 기쁨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지 ‘나에 관한 너의 신념을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확실성의 은혜’야 말로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맡길 때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챔버스는 ‘영광스러운 불확실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 영광스러운 기다림은 우리를 ‘충성’으로 이끄는 열쇠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주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세야말로 신앙인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의지 ×
우리 삶이 불확실한 것은 불안의 요소도 되지만 ‘기대’의 요소도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하고 믿을 때, 현실의 불확실성은 내일의 기대로 가득 찹니다.
계획은 내 능력안에서만 진행/가능
내가 기대못한 할수없는 일도 주님이 하시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