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8
한 줄 노트
- 주님의 진리가 임할 때, 그 진리에 반응하면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묵상질문
하나님과의 관계가 과거의 일입니까? 아니면 오늘도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야고보서 4:1-10)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성도들 안에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1절)
- 성도들의 경건생활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2-3절)
- 외적, 내적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4-5절)
-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권면은 무엇입니까? (7-10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1절)
‘싸움(헬, 폴레모스)’은 무기를 가지고 공격하는 전쟁을 의미한다. ‘다툼(헬, 마케)’은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다툼, 반목을 말한다. 야고보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과 사사로운 다툼’의 유래에 대해 말한다. 이는 ‘정욕(헬, 헤도네)’으로부터 온다. ‘헤도네’는 생물학적 욕구와 심리학적 욕구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성욕, 식욕, 물욕, 탐욕, 자만심, 명예욕, 자기자랑 등)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와 전쟁의 근원, 인간의 악한 본성과 관련된다. 육체의 정욕을 위한 태도와 방식은 영적인 삶에도 직결된다(2-3절).
간음하는 여자들아(4절)
‘간음하는(헬, 모이칼리데스)’에 쓰인 헬라어는 남성과 여성 둘 다를 지칭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행한 일들에 대해 ‘음행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렘3:8-9, 겔 16:24-29, 마12:39). 하나님과 세상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세상과 벗이 되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헬, 카토키센, 이주시키다)’ 하신 하나님의 영(히, 루아흐)은 시기와 정욕의 경향을 반대하신다. 우리 안에서 그러한 경향과 싸우신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이다(엡6:10-11, 5:8-9). 하나님께 복종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된다(8절). ‘두 마음(헬, 딥수코스)’은 ‘의심하는’, ‘주저하는’의 의미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는 ‘어중간한 믿음의 소유자’를 가리킨다(8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누가는 ‘울다(헬, 클라우사테)’를 회개의 요청과 연결하여 사용했다. 죄인들은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근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육체의 정욕으로 웃고 떠들고 즐기던 일, 배신과 음모를 감추고 드러냈던 웃음들은 이제 회개의 울음과 근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은 반드시 그분께로 돌아와야 한다(욜2:12). 야고보가 하는 권면은 개종자들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임에도 악한 행위를 계속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회개해야 하고(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었던 ‘생각’과 ‘태도’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신다(6절). 하나님 앞에 ‘죽고’ 자신을 전적으로 위임하는 ‘겸손한 자’는 내주하시는 성령 뿐 아니라, 성령 충만의 은혜와 역사를 맛보게 된다.
반응에 따라
오늘 묵상은 어제 묵상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하고 기꺼이 스스로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사역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챔버스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압적이지 않으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책임은 각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당신이 다른 사람 대신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 복음의 메시지는 언제나 사람이 반응하도록 인도합니다.”
반응하도록 인도하는 것과 강압적으로 반응을 만드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복음에 대하여 반응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만, 반응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4장 8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가까이 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복음의 진리에 반응하지 않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경은 미련한 자가 십자가의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상식과 논리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은 똑똑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렇게 미련한 결심으로 인해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반응’이란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영혼에 임했을 때 그 진리에 반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진리는 그냥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런 생각 해보셨나요? 복음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류 가운데는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복음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음을 지금 접하고 있는 우리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떠나버린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의 복음에 한 번 반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복음에 반응하는 순간 복음의 역사가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게 합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진리에 발을 내 딛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시 후퇴하고, 다시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또 쓰러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복음에 반응해야 합니다.
매트 챈들러와 마이클 스네처가 쓴 [복음이 바꾼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 전이나 후나 죄는 똑같이 나쁜 것이다.
우리가 불협화음을 낸 것은 마음속의 죄, 곧 아담에게서 물려받아 우리 스스로 받아들인 죄 때문이다. 이 죄로 인해 우리는 죽음과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예수님이 개입하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를 선물로 받았다. 그 즉시, 그분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노래를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우리 앞에 생명과 기쁨, 온갖 복으로 향하는 새 길을 뚫으셨다.
믿음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셨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다시 천국에 들어갈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보다 크다고 믿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죄를 짓다가는 천국행 철로가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증거는 완벽이 아니다. 비상식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구원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끊임없이’ 회개하고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다.
복음 앞에서 크리스천의 올바른 반응은 지속적인 회개다.
책에서는 복음이 우리를 변화시킬 때, 우리의 올바른 반응은 지속적인 회개라고 말합니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친밀함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관계를 맺자’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는 순간 이 세상의 마귀 세력이 힘을 잃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관계를 맺는 순간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인 결단이며, 계속해서 주님께 연결되어 있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시고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