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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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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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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노트

  •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묵상질문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나의 마음속에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자랑만큼 하나님이 가려진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묵상 레시피

◆골로새서 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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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27)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24절)
  • 바울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5절)
  • 바울이 이루려 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6-27절)
  • 바울은 무엇으로 이를 이루려 했습니까? (25절)

나는,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절)
‘기뻐하다(헬, 카이로)’는 보통 평안과 번영으로부터 오는 감정을 가리킨다. 바울은 현재 갇힌 몸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울의 기쁨은 ‘하나님의 충만’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의 고난은 몸 된 교회를 위해 기꺼이 받는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노라(24절)
‘남은(헬, 휘스테레마)’이라는 단어는 ‘부족함, 보충되어야 할 사람, 사물’에 함께 사용된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이 구원을 이루기에 뭔가 부족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할 일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완수하기까지 바울과 교회가 아직 해야 할 사명과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바울은 이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헬, 아타나플레로오)’ 이 단어는 ‘번갈아 채우다’라는 뜻으로 ‘계속, 반복하여 새로운 고통을 가득가득 채운다’는 의미이다.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이루려 함이니라(25절)
‘직분(헬, 오이코노미안)’은 ‘집(헬, 오이코스)’을 뜻하는 단어와 ‘처리하다(헬, 네모)’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이 단어의 주어가 하나님일 경우에는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나타낸다. 바울이 날마다 고난을 채우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고, 감당한 이유는 바울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서 사역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명확한 사명의 목적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이루려 함이라, 헬, 플레로오)’ 되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 말씀을 ‘비밀(26절)’이라고 표현하며, 이 비밀은 곧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27절)’라고 밝힌다.


◆ 묵상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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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이 드러나는 것

오늘 묵상은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용한 말씀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요점이며, 이것의 의미가 원문 제목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희생적 봉사”(Sacramental service)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사실 희생적이라고 번역한 ‘sacramental’이라는 단어는 ‘성례전적’이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것이 ‘성례전’입니다. 그러니 성례전적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온전히 자신을 드려 희생하며 사역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챔버스가 여러 번 언급한 ‘그리스도의 구속과 일치되는 사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뜻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내어드린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사역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일꾼의 인격이 뛰어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꾼의 삶의 요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실체가 다른 사람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사역자들이 ‘뛰어난 인격’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순수한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유혹에 노출됩니다. 우리의 장점, 능력, 유용한 방법들을 복음의 능력보다 앞세우려 합니다. 이러한 시도들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는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욕망들을 가지게 됩니다. 챔버스가 늘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가 관심을 받고 칭찬받는 만큼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려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인격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의 형상을 본받아]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당신의 ‘마음의 보좌’를 드려라. 그러면 주께서 당신을 통해 주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럴 때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善)이 드러날 때 절대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어떤 특징을 볼 때 그들은 그러한 특징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고상함과 다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닮은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선함은 주님의 ‘친절’이요, 주님의 ‘인내’이며, 주님의 ‘순결’이다. 결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경건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인간적인 속성이 뒤로 물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성향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역사 가운데서 쓰러진 크리스천 리더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훌륭하게 사역을 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던 사람들이 타락합니다. 타락은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에 관한 진리와 복음을 전파할 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셨는데,

우리의 가진 것을 드러내며 자랑하려 하니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희생적 봉사’란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권리를 주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나를 내어 드릴 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희생적 봉사’는 온전히 주님만이 드러나고, 주님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로 쓰임 받는 것이 가장 귀함을 계속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신발털이개’로 사용되기를 기꺼이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역자들은 끊임없는 유혹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평가에 매달리는 것이죠. 사람들의 칭찬에 위로를 받고 사람들의 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인간적 매력으로 사람을 끄는 것은 복음의 선포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복음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인격으로 사람을 끌면, 그의 호소력은 그의 인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 하나가 되면 사람을 끄는 것은 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위험은 언제나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처절한 고민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또 다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챔버스 역시 사람들에게 청함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대우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 즉 ‘희생적 봉사’임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위대한 고민이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고민이 늘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야 합니다.

오늘 나의 사역 가운데 그리스도가 높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인정을 받고 있는가?

치열하게, 불꽃같이 자신을 살랐던 하용조 목사님도 동일한 고민을 하며 사셨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에게]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영광’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때는 인간이 영광을 받을 때가 아닙니다. 인간이 높은 자리에 있거나 명예와 성공을 성취했을 때 행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마땅히 영광을 받으실 분에게 영광을 돌릴 때 옵니다. 인간의 참된 본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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