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보 QT MY 메뉴
이전으로
2021년 10월 26일 화요일
다음으로
이전으로
2021년 10월 26일 화요일
다음으로
주님은 나의 최고봉

보냄 받은 자

통독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video poster

한 줄 노트

  • 선교 사역은 결과가 아닌 충성의 과정을 사는 것입니다.
  • 선교사의 마음에는 사람의 필요가 아닌 예수님의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묵상 레시피

◆사도행전 3:1-10 + 요한복음 20:21
펼치기/접기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요한복음 20:21)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1-2절)
  •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3-5절)
  • 사도들이 그를 눈여겨 보고 행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6절)
  •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7-10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2절)
베드로와 요한이 만난 이는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치유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그는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못 걷는 자’, 약 40여 년 동안(4:22) 그 상태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걸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이 율법에 순종할 때 가난한 자들이 없을 거라고 기록되어 있다(신 15:4). 그러나 이 사람이 구걸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성전’ 문 앞이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불순종과 영적 무기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도들은 몇 푼의 물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문제의 근원을 치유하는 이적을 베푼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치유할 복음 선포의 문을 연다.

주목하여 이르되(4절)
이에 사용된 ‘헬, 아테니조’는 적극적이고 애정이 담긴 행동을 가리킨다. 베드로와 요한은 물질이 필요한 연민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한 인격체로서 바라보았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6절)
베드로와 요한은 못 걷고 구걸하던 이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없거니와’에는 단순한 물질적 동정의 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한다. 그들이 서 있는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은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의 성전은 영적 능력을 상실했다. 사도들은 못 걷는 걸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더 가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9절)
사도행전 2장-4장까지의 구조는 유사하다. 2장은 성령 강림과 방언의 역사 – 베드로의 오순절 성령 강림 설교 – 교회의 부흥으로 구성되어 있다. 3장-4장 역시 못 걷는 자의 치유 이적 기사 – 베드로의 설교 – 교회의 부흥으로 구성되어 있다. 9-10절, 치유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곧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된다. 즉,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일어난 이후에는 복음이 선포되고 부흥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부흥은 이적과 기사가 아니라 복음이 선포될 때 이루어진다.


◆ 묵상도움글
펼치기/접기

1. 선교사란?

지난 9월 4일 묵상에서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상에서 부르시고, 훈련의 과정을 통해 으깨셔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도록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오늘은 선교사의 특징이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다루고, 내일 묵상을 통해서는 선교 방법에 대하여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선교사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은 것같이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선교사의 마음에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가 쓴 [제자입니까]에 보면 바로 이 부분에서 고민했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열심히 목회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결국, 너는 지금 교회가 아니라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 누구도 아버지가 없다. 너는 교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분주한 고아원 원장이다. 네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고 운영비를 지급하고 우윳병을 챙긴다 하지만, 너는 물론 그 어느 교역자도 실제로 그 갓난아기들을 양육하고 있지 않다,” 그분 말씀이 또 옳았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여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보냄 받은 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명확하게 구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자신이 수고했다고 칭찬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 내면에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평가받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선교 사역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선교사의 이상은 주님께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입니다. 평생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당신의 사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선교 사역의 제 1 목적

늘 그랬듯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인격적 친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친밀함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의 관점을 내 안에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친밀함에 간격이 생기면 자꾸 다른 것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주의하십시오.

“선교 사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동정심이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의미를 완전하게 압도해버립니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만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사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실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서 자신이 칭찬받으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이 하신 일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고,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라 평생을 사역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수치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염려했던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27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나는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이나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하라고 하시면 하고, 가라고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으면 됩니다.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로딩중...
0:00 0:00
닫기
1.0x
0.5 1.0 1.2 1.5 2.0
닫기

구독설정

구독한 콘텐츠는 MY구독에서 한번에 볼 수 있어요.

구독하기
통독 녹음을 해 보세요.
00 : 00 :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