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요 16:26-27
한 줄 노트
-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묵상질문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나의 의지로 드리는 것인가요,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인가요?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13:8-13)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요한복음 16:26-27)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9-11절)
- 그런 평가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8절)
- 우리의 앎은 어떤 상태입니까? (12절 상반절)
-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때에는 어떤 상태가 될 것입니까? (12절 하반절)
- 온전한 앎은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13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10절)
‘온전한 것’이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12절)을 말한다. 고린도 성도들은 아직 온전한 하나님 인식에 들어와 있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 삶의 근거요, 원동력이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사랑’ 보다는 예언, 방언, 지식 등 언젠가 소멸되고 폐하여질 것에 더욱 열광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11절)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성도들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장성한 사람, 진정한 성령의 사람은 부분적인 인식에서 온전한 인식으로 전환한다. 거울로 보는 것은 희미하고 부분적인 앎이다.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것은 분명하고 온전한 앎이다. 현재 우리의 앎은 성령을 통한 것이라 할지라도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앎과 인식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이는 지적 과정이나 영적인 통찰보다는 인격적인 만남, 사랑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가능해 진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절)
믿음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고후5:7).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참여할 때 끝난다(롬8:24-25). 그러나 사랑은 예수를 통해 주어진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며, 하나님/이웃과의 만남에서 지속된다. 사랑만이 시간성을 극복할 수 있고, 사랑만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도 사랑이다.
1. 아버지와의 연합이 중요하다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아버지와 친밀함 가운데서 그분의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묵상에서도 ‘그날’이 나옵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곧 주님의 속성에 따라 구하라는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을 무슨 마술처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속성을 따라 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성품에 맞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주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일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일 때 일어납니다. 주님의 성품도 모르면서 우리 마음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기도를 마술 방망이 휘두르는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그날’은 미래의 어떤 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본문 요한복음 16장 27절에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외부의 곤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곤경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았던 것같이, 주님께서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를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우리에게 보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눈높이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 열립니다. 우리의 기도가 온전하게 주님의 인격으로 구하는 기도라면 얼마나 좋을까요?우리가 삶에서 늘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함, 아버지와의 연합을 구해야 합니다.
2.주님의 이름으로
요한복음 16장 23절 말씀에 보면 조금 이해하기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날’은 주님이 아버지와 연합하셨던 것과 같이,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방해가 없는 날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날입니다.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완벽한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복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완전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진보입니까?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완벽하신 주권적인 뜻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챔버스는 하나님과 성도 간에 아무런 방해가 없는, 자유로운 관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속성’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기도로 스스로를 속박하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커다란 장애물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브라이언 채플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를 보세요.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결코 속박할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축복을 감히 장담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조종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고,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며 안식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일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천군을 동원하실 것임을 확신하며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열쇠다.
브라이언 채플 목사는 우리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속박하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속성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